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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악론(樂論) 연구

원문정보

A study on the Discussion of Music of Myeongjae Yun Jeung

이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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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Myeongjae Yun Jeung (1629~1714) was the leader of Soron (少論), one of the factions competing for political dominance in Joseon dynasty. He did not seek to take governmental positions, but was dedicated to teaching students. Being respected for his knowledge and virtuous behavior, Yun was also adept in music. One time, he was offered a position of Jangakwonjeong (掌樂院正), which can be translated as the director of the National Music Center, a high governmental position. He was granted the posthumous title of Munseong (文成) by the king for his moral life and mastery in virtuous music (禮樂). On music, he said that man should try to learn music suitable to his or her life cycle. His musical activities can be identified by musical pieces listed in Myeongjaeyugo (明齋遺稿), the book compiling his writings published after he died. However, there has not been any research dealing with them. Accordingly, this research analyzed his view on music in his work. His arguments can be summarized into two categories. The first category is his support for singing poem (詩唱). When he was alone, he would go to Songdan (松壇) in his residence Yubongjeongsa (酉峯亭舍), and sing poem songs. In those days, Confucian scholars and governmental officials liked to sing Sigyeong (詩經), the compilation of poems and songs written by Confucius. Yun argued that it was good for Confucian scholars to write poems and sing those poems to cultivate good personalities. He wanted to promote a musical culture in which people could share an atmosphere to eliminate viciousness instead of focusing on formalities in Confucian scriptures. The second category is Geomungo (玄琴), a stringed instrument. He enjoyed listening to performance of Geomungo with his friends, and put a Geomungo in his room. The reason why he kept the instrument is that he disciplined himself (愼獨) to overcome his greed and anxiety. At the same time, he would project the value of stringless Geomungo (無絃琴) to a Chinese parasol tree, whose stem was used to make Geomungo in his garden. What he tried to pursue through music can be clearly identified with his letters he exchanged with his son Yun Haeng-gyo. In those letters, he wrote that, to work without vicious mind and to keep justice in mind, one should be pious as if playing the Geomungo or singing to it. Therefore, we can understand that his goal he kept in mind when he enjoyed the instrument was to calm his mind and keep the spirit of the Doctrine of the Mean (中庸). In another sense, he wanted to suppress his mind tending to deviate from the center as if the playing of the Geomungo could vary. The reason why there were musical pieces which could foster ruins of the country and chaos of the world was that there was indecent behavior of the king, according to Yun. Therefore, Yun advised Confucian scholars not to use music as means of entertainment, but to use music to discipline the scholars themselves. Emphasizing that the usefulness of music lay in its effect on self-discipline, he tried to live up to the principle. According to Yun, if people recognized the value of music, tried to learn such value, they could realize the harmony and order of the society. Furthermore, he tried hard to teach students to educate them to have filial piety imbedded in virtuous music. We can identify Yun's view that it is the process of realizing the value of virtuous music and displaying the traditional filial piety.

한국어

명재 윤증(尹拯)은 소론(少論)의 수장으로 출사에 뜻을 두지 않고 후학양성에 헌신한 인물이다.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존경받았던 선생은 악학(樂學)에 정통하였다. 숙종 조에 장악원의 실무를 담당했던 정3품 장악원정(掌樂院正)의 직책을 제안받았으며, 사후에는 도덕이 널리 알려지고 예악(禮樂)에 밝다 하여 문성(文成)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음악에 관해서는 생애주기에 맞게 일생을 정진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며 몸소 실천했다. 이러한 윤증의 음악 활동은 『명재유고(明齋遺稿)』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에도 현재까지 이에 관해 조명한 연구는 없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윤증의 작품에 나타난 음악론(音樂論)을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음악에 내재한 정신을 중요시하며 강조한 내용은 두 가지로 축약할 수 있었다. 첫째, 시창(詩唱)이다. 홀로 있을 때는 유봉정사(酉峯亭舍) 옆에 마련한 송단(松壇)에서 시를 노래했다. 교류의 장에서는 『시경(詩經)』을 가창했던 당대의 풍토에서 벗어나 인성을 감화시킬 수 있는 시를 지어 노래하는 것도 좋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경전을 부르며 격식에 치중하기보다는 사특함을 없애기 위한 마음가짐을 공유할 수 있는 음악 문화를 조성하고자 했다. 둘째, 거문고[玄琴]이다. 자연에서 벗과 연주를 감상하며 풍류를 즐겼을 뿐 아니라 당(堂) 안에는 악기를 비치해 두었다. 윤증이 거문고를 소장한 이유는 욕심과 시름을 금(禁)하기 위한 신독(愼獨)의 방편이었다. 정원에 심어 놓은 벽오동에는 무현금(無絃琴)의 가치를 투영(投影)하여 관조하기도 했다. 이렇듯 음악으로 지향했던 바는 아들인 윤행교(尹行敎)와 주고받은 서(書)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일을 행함에 있어서 사심(邪心)을 버리고 의(義)로써 재단하기 위해서는 금을 타거나 노래하듯이 경건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따라서 윤증이 생각한 금가(琴歌)의 목적은 심지(心地)를 안정시켜서 중용(中庸)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다른 한편으로 해석해보면 음악의 활용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쓰임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망국지음(亡國之音)과 난세지음(亂世之音)이 존재하는 이유는 악곡이 문제가 아니라 방탕한 임금의 행태 때문이다. 윤증은 선비사회에서 음악이 향락에 쓰임을 금기함과 동시에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위해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음악의 효용적 가치가 의(義)를 염두에 둔 수양의 과정에 필요함을 강조하며 개인부터 실천하는 삶의 자세를 견지했다. 음악의 쓰임과 이에 내재한 가치를 바르게 알고 중화(中和)하기 위해 연마한다면 사회 공동체의 조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다고 여겼다. 더 나아가 예악에 내재한 효(孝) 사상이 발현되도록 후학양성에 집중했다. 예악(禮樂)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 선조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 여겼던 윤증의 확고한 의중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목차

<한글요약문>
1. 머리말
2. 『명재유고』의 작품을 통해 본 윤증의 음악 활동
1) 시창(詩唱)
2) 거문고
3. 『명재유고』에 나타난 윤증의 악론
1) 음악을 통한 중용(中庸)의 실천 강조
2) 올바른 쓰임을 통한 음악의 효용적 가치 발현
3) 예악에 내재한 효의 정신 실천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이장원 Lee, Jang-Won. 노성중학교 교사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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