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Korean Empire recorded the continuity of the nations of Dangun-Giza-Samhan-Koryeo-Joseon. The Korean Empire influenced Malgal and Tamla, and had a sense of territories of 4,000-li. Gojong thought that he exercised his right of independence thanks to Sang-Je. Historical continuity for Dangun and Giza was revealed in record of the Gojong period. In the Gojong period, Joseon Dynasty recognized Dangun and Giza as equally authentic. In the Gojong period, Joseon also recognized the connection between Hwanin, Hwanung and Dangun. In the period of the Gojong period, Dangun was the beginning and Giza was created a culture. Shin Chae-ho emphasized the continuity of the nations of Dangun Chosun, Sam-Joseon (Samhan), and the Three Kingdoms (Goguryeo and Bohae Center). According to Shin Chae-ho, Article 8 is the job of the contents of the 8th administration of Article 3 of Hong-Beo, and that article 8 itself succeeded the law of Dangun. Shin Chae-ho emphasized the role of Myocheong (Hwarangpa) in the Goryeo Dynasty. Shin Chae-ho and the Korean Empire had the same common roots of the Dangun people. Nevertheless, the Korean Empire could not abandon Confucianism based on the perception of “Chineseism” and Shin Chae-ho sought a national breakthrough in the Hwarangpa by thoroughly criticizing Confucianism in Joseon.
한국어
대한제국은 단군-기자-삼한-고려-조선이라는 민족의 연속성을 기록 했다. 대한제국은 말갈, 탐라 등에 영향을 미쳐 4천리 강토의 영토의식 을 가졌다. 대한제국은 예악(禮樂)과 법도를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다고 선언했다. 고종은 상제(上帝)의 덕분에 자주의 권리를 행 사했다고 생각했다. 강관(講官) 정기세는 조선의 역사를 단군(檀君)-기 자(箕子)-삼한(三韓)-삼국(三國)-고려(高麗)-조선(朝鮮)이라고 고종 에게 설명했다. 정기세는 조선과 중국의 존속 기간이 동일하다고 주장했 다. 단군과 기자에 대한 역사적 연속성은 고종시대 관찬기록에서 드러났 다. 고종시대 조선은 단군과 기자를 대등하게 조선의 정통성으로 인정했 다. 고종시대 숭령전(崇靈殿)에 도신(道臣)을 보내서 단군에 대한 제사 가 실행되었다. 고종시대 조선은 환인·환웅·단군의 연관성도 인정했다. 고종시대 시조는 단군과 문화는 기자였다. 즉 조선과 대한제국은 단군이 조선의 시작이라는 인식, 기자가 예악과 문물의 중화의 수준에 오른 시 기라고 판단했다. 대한제국은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의 예악과 문물을 받아서 송(宋) 나라와 명(明) 나라의 계보를 잇는 소중화 인식 등이 핵 심이었다. 고종은 단군이 무진년(BC2333)에 나라를 세웠고, 천세(千歲)의 맑은 기운을 갖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또한 고종은 기자(箕子)의 8조목의 가 르침으로 문화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종시대 단군과 기자가 조 선의 동일한 연속성으로 파악되었는데, “편발(編髮)의 풍속이 점차 고 계(高髻, 높은 상투)의 풍속으로 변했다”며 단군과 기자 조선은 머리칼 을 아끼는 문화이며 4천 년 동안 굳어진 풍습이었다. 신채호는 단군조선-삼조선(삼한)-열국쟁웅(부여 중심)-삼국(고구려 와 발해 중심)이라는 민족의 연속성을 중시했다. 신채호에 따르면 8조 (八條)는 기자 자신이 강술하였던 홍범의 제3조의 8정(八政) 가운데 나 오는 내용의 직무인데, 그 8조 자체가 곧 단군의 유법을 계승한 것이었 다. 신채호는 고려시대 서경전쟁에서 묘청(화랑파)의 역할을 중시하였고, 조선시대 세종의 한글 창제와 갑오개혁을 주목했지만 사대주의라는 한계 를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신채호와 대한제국은 단군이라는 민족의 공통적 뿌리가 동일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은 ‘소중화’ 인식에 기초한 유학파를 버리지 못했고, 신채호는 조선의 유교파를 철저히 비판하며 화랑파에서 민족의 돌파구를 찾았다.
목차
1. 머리말
2. 고종시대 관찬기록의 전근대사 인식
3. 신채호 저서의 전근대사 인식
1) 단군조선
2) 기자조선
3) 삼조선(三朝鮮)=삼한(三韓)
4) 열국쟁웅시대
5) 고려와 조선 인식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