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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學】

일본 3대 신문을 통해 본 안중근 의거의 의의 ― 아사히(朝日), 요미우리(読売), 마이니치(毎日)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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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ʼ Cognition of Ahn Jung-Geun ─ Focusing on The Asahi Shimbun, The Yomiuri Shimbun, The Mainichi Shimbun, From 1909 to 1910 ─

김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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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An Jung-geun was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nationalist. On October 26, 1909, he assassinated Itō Hirobumi, a four-time Prime Minister of Japan and former Resident-General of Korea, following the signing of the Eulsa Treaty, with Korea on the verge of annexation by Japan. Ahn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1962 by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he most prestigious civil decor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for his efforts for Korean independence. In this study, 󰡔Japaneseʼ Cognition of Ahn Jung-Geun-Focusing on The Asahi Shimbun, The Yomiuri Shimbun, The Mainichi Shimbun, From 1909 to 1910󰡕 is the following meaning. The First, Korea under Japanese rule(from 1909 to 1910), it will serve as an opportunity for the Japanese people to recognize the direction of Ahn Jung-geun. The Second, Korea under Japanese rule(from 1909 to 1910), It will also be able to understand the patriotic deed of An Jung-geun were conveyed to the Japanese. The Third, it can present objective data on Japanese imperialism and Japanese consciousness, and can be helpful in deriving Japanese policies and public opinion.

한국어

안중근은 대한제국 시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다. 한국과 일본의 입장에 따라,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이다. 역사인식의 차이가 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사람에 따라 그 평가는 상이하다. 이처럼 안중근에 대한 관심은 양국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관심은 1909년 10월 26일에 있었던 안중근 의거, 당시 국제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어 주목받았고 역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사건이었으므로 이와 관련된 연구는 상당히 많다. 그러나 당시 일본 내 자국민들, 즉 일본인들에게 안중근 의거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아직 미흡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인 대상으로 발행된 일본 내 신문에 실린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신문 기사의 분석을 통해서 안중근 의거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수범위를 1909년부터 1910년까지로 정한 것은 의거 후 당시 일본에서의 안중근 의거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한 상황을 살펴보고자 함도 있으며, 이 시기가 일제강점기 전 일본이 무단정책을 실시한 시기였음으로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시기라는 점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본고 「안중근 의거, 아사히・요미우리・마이니치 신문을 통해 -1909년부터 1910년까지-」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1909년부터 1910년대까지, 즉 일제강점기 중 한국인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시기에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이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둘째,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을 파악할 수 있고, 일본인들의 의식에 대한 접근 및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셋째, 1909년부터 1910년대, 당시 안중근 의거에 대한 정보,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기본 정보,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상황, 의거 장소, 의거 시간 등 가장 기초적인 정보들이 일본 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일본 정부의 정책, 목적 내용의 변천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연구이다. 이는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실상이나 일본인 의식에 관한 객관적 자료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자료는 일본의 정책과 여론 등의 파생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정치적 이유로 한일관계는 악화 일로에 서있다. 그러나 한국인, 일본인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감을 갖게 된다면, 동아시아의 평화를 원하셨던 안중근 의사의 뜻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어

本稿で取り上げる「安重根(アン・ジュングン)」は、大韓帝国時代の朝鮮の独立運動家である。立場が違えば「歴史認識が違って当然」で、正反対の評価が下されるということはしばしばある。日本では安重根への評価は、様々で、時代によって変遷して、人によって大きく異なる。特に韓日の安重根の評価の違いは、韓日両国の永続的な確執の象徴になった。 本稿の「安重根義挙、朝日・読売・毎日新聞を通じて-1909年から1910年まで-󰡕は次のような意味を持っている。 第一、1909年から1910年まで、日帝强占期のうち韓国人に対する弾圧がひどかった時期に、安重根義士に対する日本人の認識がどのような方向に流れているかを把握できる契機になることである。 第二、実証的、具体的資料を通じて日帝强占期のうちの安重根義士に対する日本人の認識を把握できている。 第三、1909年から1910年まで、安重根義挙に関する情報など、最も基礎的な情報が日本内の日本人たちにどのように渡されたかも把握することができる。 第四、日本政府の政策、目的の内容の変遷を把握するのに必要な研究である。これは当時、日本帝国主義の実態や日本人意識に関する客観的資料を提示することができるものであり、このような資料は日本の政策と世論などの派生の研究に役立つことができる。 第五、政治的理由に韓日関係は悪化の一途に立っている。しかし、韓国人、日本人がお互いを理解できる共感を持つようになったら、東アジアの平和が欲しかった安重根義士の意味を引き継いでいく土台を築くことができる。

목차

<要旨>
Ⅰ. 서론
Ⅱ. 안중근 의거 직후, 3대 신문
Ⅲ. 안중근 의거 이유
Ⅳ. 인간 안중근 의사
Ⅴ. 결론
参考文献
<要旨>

저자정보

  • 김미옥 전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중일비교문학 전공,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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