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March 1st Movement in Korea and the May 4th Movement in China are both resistance movements against Japanese aggression policy. In 1910s, Korea became a Japanese colony under the rule of Gendarmerie, while China, accepting the twentyone demands of Japan, was on the verge of subjugation. When the World War I ended and the Paris Peace conference began, both the Koreans and Chinese had great hopes on this conference. They were eager to solve the Korean independence problem and China's Shandong problem through the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put forward by US President Wilson. However, the interests of the western powers and the obstruction of Japan made all of these go for naught, thereby resulting in the outbreak of the March 1st and May 4th Movements. In the face of common enemies and common destiny, the Koreans and Chinese supported each other. The newspaper and magazines in many parts of China, such as Shanghai and Beijing, have made headlines on the news of March 1st Movement and expressed solidarity with Koreans. Two months later, the May 4th Movement broke out in China, and many Koreans not only supported it, but also directly participated in it. The March 1st and May 4th Movements became direct opportunities to reverse the trend of the Korean and Chinese history. After the cruel repression of March 1st Movement by the Governor's Office of Korea, many South Koreans realized that they could not win the independence of Korea at all by nonviolent movement. So, they set up antiJapanese armed groups in Shanghai and even Manchuria to carry out the independence movement across the Tumen River and the Yalu River. The same was true for China also. After the May 4th Movement was suppressed by the warlords in Beijing, the Chinese abandoned their fantasies of northern warlords and imperialism. They started a new democratic revolution against imperialism and feudalism. Presently, 100 years have passed after the March 1st and May 4th Movements. While commemorating these two farreaching historical events, we should make a correct summary of them and wait for the new future of the northeast Asia.
한국어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모두 일본의 침략정책에 대한 저항이였 다. 1910년대 한국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잔혹한 헌병 “무단”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중국은 일본의 “21개조”를 수용하면서 역시 망국의 위험에 빠지 고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결속되면서 파리평화회의가 개최되자 한국인과 중국 인들은 모두 이 회의에 많은 기대를 하면서 미국대통령 월신이 제기한 “민족자 결”원칙에 의해 한국의 독립문제와 중국의 산동문제가 해결되기를 갈망했다. 그 러나 서발열강들의 이해관계와 일본의 방해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 가자 끝내 “3.1”운동과 “5.4”운동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공동의 적과 같은 운명의 앞에서 한 국인들과 중국인들은 서로 성원하고 지지하였다. 상해, 북경 등 중국의 많은 지역 의 신문과 잡지들은 서로 앞다투어 “3.1”운동의 소식을 보도하면서 중국인들에게 성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2달 후, 중국에서 “5.4”이 폭발하자 많은 한국인들은 성 원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이 운동에 직접 참가하였다. “3.1”운동과 “5.4”운동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아. “3.1”운동이 조선총독부의 잔혹한 탄압을 받자, 평화시위로서 조 선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한국인들은 두만강, 압 록강을 건너 가 상해 내지 만주지역에서 많은 반일무장단체를 건립하고 독립운동 을 펼쳤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5.4”운동이 북양군벌의 탄압을 받게 되자 중국 인들은 더는 북양군벌과 제국주의에 미련을 두지 않고 반제반봉건의 신민주주의 혁명을 시작하였다. “3.1”운동과 “5.4”운동은 인제는100년이 지났다. 우리는 이 뜻 깊은 역사사건을 기념하는 동시에 반드시 그것을 참답게 총화하여 동부아의 새로 운 미래를 내다 보아야 한다.
목차
1. 서언
2. “3.1”운동과 “5.4”운동의 전야 한, 중 사상동태
3. “3.1”운동과 “5.4”운동에서 나타 난 한, 중 공동운명 의식
4. 미래 지향적인 한중일 관계와 공동체의식
5. 결어
参考文献(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