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일기』를 통해 본 貢人 池圭植家의 의례 실행


The Performance of Rites in Gongin(貢人) Ji Gyu-sik’s Family Seen from Hajaeilgi

『하재일기』를 통해 본 공인 지규식가의 의례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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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jaeilgi(荷齋日記) was written by Ji Gyu-sik, a gongin of Saongwon(司饔院)’s branch, almost everyday for about 20 years from January 1st, 1891 until the leap month of June 29th, 1911. It deals with many different areas including domestic and foreign circumstances, customs, rituals, and all the affairs in Bunwon, and also everyday life events he did see or hear about. Particularly, it is hard to find diaries written by a person like Ji Gyu-sik who was born as jungin and of gongin(貢人) status. What this author particularly paid attention to was contents about rituals in 『Hajaeilgi』 . Ji Gyu-sik was of gongin status and wrote about the rituals actually performed then in 『Hajaeilgi』 . Such diaries are very rare, so it is evaluated very preciously as a material. It is also meaningful in terms of forklore. Therefore, this study deals with the performance of rites in gongin Ji Gyu-sik’s family through 『Hajaeilgi』 . It allowed this author to understand the aspects of carrying out rituals in gongin Ji Gyu-sik’s family residing in Bunwon of Gyeonggi from the late 19th to the early 20th century. Coming-of-age rite was performed in the first month of the year generally, but in Ji Gyu-sik’s family, it was done in that month and in April, too, which means the time of its performance became changed. Also, this seems to have been associated with Ji Gyu-sik having his sons carry out coming-of-age rite with their wedding ahead. About the wedding, considering the case of Ji Gyu-sik’s family, we can see picking a day was not necessarily done by the bride’s family then. When the groom’s family had any problem, the bride’s adjusted the day for the wedding. But it is noticeable that Ji Gyu-sik chose the day himself for his sons and daughters’ weddings. Normally, the wedding ceremony was performed in the bride’s house, but in the case of Ji Gyu-sik’s family, it was done in the groom’s, so it means it was carried out differently case by case. Considering the weddings of Ji Gyu-sik’s children, we can see he applied and practiced the traditional, Confucian procedure rather faithfully. But in Ji Gyu-sik’s family, sometimes, they ignored traditional manners as they had the wedding during the period of mourning or took the bride to the groom’s to have the wedding. This seems to have been associated with the decline of Confucian social order in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We can also find some changes in customs as well. About funeral rite, in Ji Gyu-sik’s family, the period from death to balin (carrying out a bier for burial) and hagwan (lowering a coffin into the grave) varied as the very day or two, three, four, or five days. Here, we can see the period from death to balin and hagwan changed from before. Also, we can find the traces of 3-iljang (burial on the third day after death) that is ordinarily found these days in 󰡔Hajaeilgi󰡕. It is evaluated highly as a material. Meanwhile, among jungin or commoners, the funeral or burial procedure, for instance, bogu and seup, soryeomㆍdaeryeom, seongbok, or balin was applied flexibly case by case according to the situations or circumstances. Regarding ancestral rite, in Ji Gyu-sik’s family, the time for memorial service was not fixed. Also, before having gijesa, Ji Gyu-sik did not follow jegye(齋戒). Even on the day before memorial service, he went to pub to see his lover or drink. One day, he went to pub at night to appreciate flowers and then came back home to have memorial service. This appears to be different from the practice of yangban sadaebu’s family. Even after joining Christianity, Ji Gyu-sik still practiced gijesa, and after entering Cheondogyo, he kept performing gijesa. In fact, normally, people had charye for Chuseok in the shrine and then visited their ancestral tombs. But except for special cases, Ji Gyu-sik had charye right before the tomb in Hansik or Chuseok himself or by sending his brother or sons there. The aspects of gijesa, charye, burial, performed by gongin Ji Gyu-sik’s family born as jungin in Gwangju of Gyeonggi around the time Chosun was colonized by Japan and the status system was abolished were a bit different from those of ancestral rites performed in yangban family and were less strict; however, it is still significant in that it is how ancestral rites were practiced in gongin family belonging to jungin. About suyeonrye, there are no particulars as it only involves Ji Gyu-sik and his wife’s hoegap (60th birthday). As seen above, the contents about the performance of rites in gongin Ji Gyu-sik’s family found in 『Hajaeilgi』 are highly valuable as materials through which we can see how rituals were carried out by people, especially jungin, in Gwangju of Gyeonggi during the late 19th up to the 20th century, and it is also very meaningful in terms of forklore as well.


지규식(池圭植)은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의 공인(貢人)으로, 1891년 1월부터 1911년 윤6월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그가 쓴 『하재일기(荷齋日記)』 에는 국내외 정세와 풍속, 의례, 분원 관련 각종 제반사항, 일상생활사 등등 보고 들은 사실들을 다방면에 걸쳐 다양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특히 지규식 같이 중인출신의 공인(貢人) 신분이 쓴 일기는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그 의의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필자는 공인(貢人) 신분의 지규식이 당시 실제로 행했던 의례 관련 내용을 『하재일기』 에 기록으로 남겼다는데 주목하였다. 이러한 일기는 극히 드물 뿐만 아니라 자료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되며, 민속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본고는 『하재일기』 를 통해 공인(貢人) 지규식가(池圭植家)의 의례(儀禮) 실행(實行)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경기도 분원마을에 거주했던 공인(貢人) 지규식가(池圭植家)에서 행한 의례 실행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중인계층(특히 경기도 지역)의 의례 실행의 실상도 엿볼 수 있었다. 출산의례의 경우, 남아선호사상은 양반뿐 아니라 중인출신인 공인(貢人) 지규식 집안에서도 여전하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궁중에서 사용했던 태항아리에 대한 기록은 참고할 만하다. 관례의 경우, 일반적으로 정월에 행했는데, 지규식 집안에서는 정월뿐만 아니라 4월에도 행하였는바 시행시기의 변화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지규식이 아들들의 혼례를 앞두고 관례를 시행하게 했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당시까지도 관례를 행할 때 마른신(乾鞋)을 신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혼례의 경우, 지규식 집안의 사례를 보면, 혼사가 성사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에는 택일을 신랑 집이나 신부 집 어느 한 집에서 일방적으로 정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신랑ㆍ신부 집안에 사정이 있을 경우, 신랑 또는 신부 집에서 택일 조정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규식은 자신의 아들과 딸 혼인날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택일하였는바 눈길을 끈다. 그리고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렀지만, 지규식 집안의 사례를 보면, 부득이 한 경우에는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루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규식 자녀들의 혼례는 당시의 전통적인 유가적(儒家的) 절차를 대체로 충실하게 적용ㆍ실행에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규식 집안에서는 전통적 예법을 무시한 채, 상중에 혼례를 치르거나(사대부가에서는 행하지 않았다)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혼례를 거행하였는바, 장소 변화의 일면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외래 종교 및 외국문화의 유입과 이식, 일본의 식민통치, 특히 신분제도 철폐와 유교적 사회질서 쇠퇴 등도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상례의 경우, 지규식 집안에서는 임종에서 발인하여 하관까지의 기간이 5일, 4일, 3일, 2일, 당일 등 다양하다. 여기서 임종에서 발인하여 하관까지의 기간이 종전보다 다소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하는 3일장의 흔적을 󰡔하재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자료적으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한편 중인이나 평민계층의 경우, 부고와 습, 소렴ㆍ대렴, 성복, 발인 등 상ㆍ장례 절차를 형편과 사정에 따라 그때그때 유동적으로 적용했던 것 같다. 장례 절차와 기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제례의 경우, 지규식 집안에서는 제사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규식은 기제사를 지내기 전에 재계(齋戒)를 안 했을 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는 등 사대부 가문보다는 격식에 덜 얽매이면서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양반사대부가 하고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지규식은 기독교에 입교하고 나서도 기제사를 지냈으며, 천도교에 입교한 후에도 제사를 지냈다. 한편, 일반적으로 추석 차례는 사당에서 지내고 성묘를 가는 것이 보통이다. 헌데 지규식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식과 추석 때 직접 또는 동생이나 아들들을 보내 묘소에 가서 차례(묘제)를 지내게 했다. 제사 시간과 차례 장소 변화의 일면 등이 눈길을 끈다.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일제가 강점할 무렵의 경기도 광주지역 중인출신 공인(貢人) 지규식 집안의 기제사, 차례와 묘제 등을 지내는 모습은 당시 사대부가의 관행보다는 약간 차이가 있는 듯 보이지만, 사대부가의 관행을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인출신 공인(貢人) 집안의 제례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본다. 수연례의 경우, 지규식과 부인의 회갑내용뿐으로 특이한 사항은 별로 없다. 그런데 부조의 경우, 물품도 다양하고 많았지만, 이 시기에는 돈으로 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는 혼ㆍ상례에서도 마찬가지로 부조(扶助) 방식의 변화 조짐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 󰡔하재일기󰡕에 나타난 공인(貢人) 지규식가(池圭植家)의 의례 실행 관련 내용은 19세기 말∼20세기 초 경기도 중인 집안(특히 광주 지역<그 중에서도 분원> 중인출신이나 貢人들의 집안)의 의례 실행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민속학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논문 요약>
Ⅰ. 머리말
Ⅱ. 『하재일기』를 통해 본 貢人池圭植家의 의례 실행
1. 출산의례: 관행 답습과 인간적 면모
2. 관례: 시행시기 변화의 조짐
3. 혼례: 혼례 장소 변화의 한 모습
4. 상례: 장례절차와 기간의 변화
5. 제례: 제사 시간과 차례 장소의 변화의 일면
6. 수연례: 부조(扶助) 방식 변화의 조짐
Ⅲ. 맺음말


  • 송재용 Song, Jae-yong. 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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