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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光의 생애와 사상 - 연구사적 검토와 과제 -

원문정보

Wonkwang’s Lifetime and Thought - The Analytical Study on Research Trends -

원광의 생애와 사상 - 연구사적 검토와 과제 -

장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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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Wonkwang(圓光) is first people in Sokgoseongjun(續高僧傳) among Silla Buddhist monk. There are two kinds of Wonkwang’s biographies, Sokgoseongjun and Gobonsuijun(古本殊異傳). But There Contents are very different about Date of Wonkwang. Research Result, Wonkwang was lived in 547~630. Wonkwang went to China to study and learnt Buddhist studies, Seongsil(成實) and Yeolban(涅槃) etc. He came back to Silla in 600. After he return from China, was appointed to an important post by King Jinpyeong(r. 579~632). He had stayed at Gaseulsa. When Gwisan and Chuhang visited him and wanted to take his Vinaya, Wonkwang gave them Common Five Commandments(世俗五戒). In 608, Wonkwang made out a Diplomatic note to beg troops. Besides, he had charge of Baekgojwa at Hwangryongsa in 613. This from a series of steps, Wonkwang was closely connected with King Jinpyeong. A Characteristic of Wonkwang’s Buddhist studies was Penitence-belief with commandments(戒懺悔信仰) that meant to hold Chomchal Buddhist Mass(占察法會). The Reason is that hold Chomchal Buddhist Mass, because he had to Realize a reform the public.

한국어

원광은 한국 승려로서 唐의 『續高僧傳』에 입전된 최초의 인물이다. 일연이 『三國遺事』 義解篇에서 圓光西學條를 가장 앞에 둔 이유도 신라 중고기에서 원광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을 잘 말해준다. 원광의 생애에 대해서는 『續高僧傳』과 古本 『殊異傳』의 기록이 상이하다. 이에 원광의 생몰년과 유학 시기 등에 대한 기왕의 연구성과가 여전히 논란 중이다. 다만 원광의 생몰년에 대해서는 『속고승전』과 『수이전』의 합리적인 내용을 조합한 547년~630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속고승전』에는 『수이전에 없는 원광의 중국에서의 교학 연구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수이전』에는 원광의 유학 동기나 귀국 후의 활동에 대해서 『속고승전』보다 자세히 남아 있다. 따라서 두 사서를 보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원광의 중국에서의 교학 연구와 귀국 후 활동을 살필 수 있다. 원광이 중국에서 배운 것은 成實學과 『열반경』ㆍ『반야경』 등이었다. 원광이 이 들 사상을 섭렵한 까닭은 그의 신분이 6두품이었으므로 空사상이 매력적이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또한 초심자가 받아들이기 쉬었고, 성실학이 儒․佛․道3교의 조 화에 적극적이라는 면도 주목하였다. 원광이 589년 陳멸망 후 隋의 長安으로 가 면서 攝論宗과 如來藏思想에 경도되어 있음도 지적되었다. 원광은 600년에 귀국한 후 진평왕의 각별한 환대를 받았다. 加悉寺에 머물 때 귀산과 추항에게 世俗五戒를 내려주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유교적 관점 에서 접근한 데 반해, 불교학계에서는 세속오계를 불교적 관점으로 분석함으로써 차이를 드러냈다. 다만 원광이 佛僧이지만 유학에도 능통했음을 감안하면 원광 안 에서 이미 儒․彿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원광은 이후 608년에 수나라에 군사를 요청하는 외교문서인 乞師表를 작성하였고, 613년에는 수나라 사신 王世儀가 황룡사에 이르자 百高座會를 주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보를 통해 원 광이 진평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이는 원광이 당시 신라 사회 에서 종교적 지도자로서 뿐만이 아닌 진평왕의 왕권 강화과정에서 정치적 역할도 수행했음을 시사한다. 신라에 귀국한 후 원광 사상의 특징은 ‘戒懺悔信仰’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원광 은 이것을 펴기 위해 占察法會를 설치하였다. 점찰법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巫覡信 仰내지 地藏信仰과 관련시킨 연구가 있었다. 원광이 점찰법회를 시행한 이유는 대중교화를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점찰법회가 장기간의 전쟁으로 이완된 민심을 수습하고 사기를 북돋아주는 데 유효하였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관련 자료의 비교와 검토
3. 원광의 생애
4. 원광의 사상과 활동
5. 맺음말
참고문헌

저자정보

  • 장창은 Jang, Chang-eun. 제주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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