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이 논문에서는 조일전쟁 (1592-98) 당시 일본 육군의 두 주력부대 인 제1군과 제2군의 사령관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사이에 있었던 갈등의 양상을 살펴본다. 이 두 장군은 규슈의 히고국 출신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가문적 배경의 차이와 종교적 차이 등 으로 인한 갈등이 일본 입장에서는 전쟁의 목표 달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조선의 지리와 풍습에 관한 정보가 더 많았 던 고니시가 히데요시로부터 제 1군 사령관으로 임명받고 부산에 제일 먼저 상륙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고니시는 제2군의 가토를 따돌리고 단독으로 충주를 향해 진격한다. 공격 루트를 달리한 가토의 제2군은 충주까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반면 중앙로를 장악한 고니시의 제1군은 부산, 동래전투에 이어 상주 및 충주 탄금대 전투를 모조리 일방적 승리로 이끌음으로써 군인으로서 의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장악한다. 충주부터 다시 시작된 한성입성 이라는 경쟁에서조차 고니시가 선점을 하게 됨으로써 가토와의 갈등은 전쟁이 지속되어 갈수록 깊어진다. 한성 점령 후 있었던 일본군 장군들 의 한성회의에서 조선팔도국할지배에서 고니시는 평안도를 담당하고 가 토는 함경도를 담당하게 되는데, 일본의 명나라 침공이라는 전쟁명분의 입장에서 본다면 명나라 방면의 평안도를 맡은 고니시가 전략적 가치 가 없는 함경도를 담당하는 가토와의 경쟁에서 사실상 이겼음을 알 수 있다.
일본어
1592年から約7年間に亘る日朝戦争は、日本軍158,800人が釜山 に上陸し開始された。この時、日本軍は9個の独立された部隊に 編成され、朝鮮侵攻に加わったが、この論文においては、朝鮮攻 撃の最先鋒に立った小西行長が率いる第一軍と、加藤清正が戦闘 を指揮した第二軍を中心に論じる。 既によく知られているように、日朝戦争で最も重要だったこの 二部隊は、全く協力的ではなかった。従って、開戦後、釜山へ上 陸してから実質的に朝鮮の攻撃を始めたのは、小西の第一軍であ り、加藤の第二軍は攻撃ルート自体からして違った。違う道を進 撃したこの二部隊は、忠州に達してようやく対面した。ここで、 日朝戦争開戦後、最初に朝鮮政府軍と戦闘をした弾琴台の戦いで さえも、小西は加藤を排除した。 一方、この重要な将軍は再度、忠州から朝鮮の首都である漢城 へお互い先に入城しようと競争をした。言い換えれば、釜山から 中央路に乗って上京した小西の第一軍は、忠州からは東部路に 乗って漢城へ向かい、一方、忠州まで慶尚道東部地域の遠回りを した加藤の第二軍が、漢城までは中央路を通過して行くことに なった。出発から露骨的に、誰が先に首都漢城に入城するかの競 争になった。結局今回も、小西の第一軍が5月2日(陰暦)の夕 方、漢城の東大門に入って、加藤部隊は2日目の5月3日に南大門か ら入城した。 この論文では、この絶体絶命の戦争で、日本軍の需要二将軍が 協力する代わりに競争を選択し、戦争中ずっとお互いの葛藤を起こすようになった原因を明らかにしようと思う。その為、この二 将軍の出身背景から豊臣秀吉との関係、更に二将軍が異なる宗教 の違いなどを中心に論議しようと思う。これを基に、二将軍間の 葛藤が日朝戦争の勝敗にどの程度の影響を及ぼしたのかに関して も論じたいと思う。
목차
1. 서론
2. 제1군(고니시 유키나가) 과 제2군(가토 기요마사)의 비교
3. 왜 고니시 유키나가가 제1군이 되었는가?
4. 일본군의 한성입성과 한성회의
5. 고니시와 가토의 갈등
6. 결론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