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On March 1, 1919, the Korean people rose up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 tyranny all over the country. The flames of the uprising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but Ahn Jae-hong did not take the lead in the March 1st National Movement. He was suppressed by Japanese police for his involvement in the Chosun Fraternity to Promote Korean Textiles and Products in March 1917 and was unemployed out of his job at the Chung-Ang School. As he was seeking the ways for Meeting the Current Situation in his tragic situation, he did not feel like he was about to come to the forefront of the March 1 national movement. Because he was marked as ‘disturbing elements’ and had to retreat to his hometown, he did not have the situation to do so. At the end of March 1919, Ahn rose to a rather high peak near his hometown of Pyongtaek and witnessed a number of torch protests in nearby villages. He confirmed the unity of the whole nation in “Cry of Independence hurrah” and jumped out of his previous passive attitude to the center of the uprising. In April 1919, he went to Seoul in order to found and establish a newspaper office to promote independent ideas. Ahn Jae-hong did not participate in the movement hurray for the demonstration, but he went back Seoul from his hometown and tried to understand the domestic and international trends in the process of organizing and developing the March 1st National Movement. After coming to Seoul, he heard in detail the information about how to establish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nd their activities in Shanghai. As such, he had the conditions to fall in the line with the goals of Korean Youths for Diplomatic Services. Korean Youths for Diplomatic Services was organized by Yeon Byung-ho in June, 1919 which was a secret resistance to support their activities in Seoul. In early July 1919, Yeon Byung-ho appointed Ahn Jae-hong as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Youth Diplomacy Services so that this organization established a leadership system for two Lee Byoung-cheol. Ahn Jae-hong. Ahn Jae-hong was in charge of writing the text including the code and rules as a whole, while Lee Byung-chul was in charge of funding and organization. Ahn Jae-hong was arrested in November 1919 for the activity and was jailed for three years which was the departure from “seven year and three months of imprisonment over nine occasions.”
한국어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은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났고, 항쟁의 불길은 전국에 퍼졌으나, 안재홍은 개인사로 인하여 3·1민족운동의 선두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1917년 3월 조선산직장려계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관헌에게 압박을 받았고, 직장이었던 중앙학교에서 ‘방축’당하여 실직 상태에 있었다. 그는 실의 속에서 시국대책을 강구하던 중이었으므로 선뜻 3·1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설 심경이 아니었으며, 또 ‘불온분자’로 찍히어 낙향하였던 터였으므로 그럴 여건도 되지 못하였다. 1919년 3월 말경 안재홍은 향리 부근의 다소 높은 어느 봉우리에 올라, 인근 마을 여러 곳에서 봉화시위가 벌어짐을 목격하면서, “天地도 들썩거리는 듯한 獨立萬歲의 웅성궂은 아우성은, 문자 그대로 人民反抗이요 民族抗爭”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 ‘아우성’에서 민족 안의 민중, 나아가 민중의 민족성을 보았고, 이들의 정의감과 비감함을 확인함으로써 이전의 소극스럽던 자세를 털어내고 항쟁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1919년 4월 그는 신문사를 설립·운영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上京하였다. 안재홍은 3·1만세시위운동의 초기 과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임시정부의 외교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청년외교단에 참여·활동함으로써 3·1민족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향리에서 서울을 오가며 국내외의 동향은 물론, 3·1만세운동이 조직화되고 전개되는 과정을 파악하였다. 상경한 후에도 상해에 임시정부가 건립되는 전말, 임시정부의 ‘청년 부대’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내용들도 상세히 전문하여 인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안재홍은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알고 있던 터였으므로, 그가 청년외교단의 활동 목표에 동조할 여건은 이미 마련되었고, 청년외교단이 그를 총무로 추대하자 즉각 수락하였다. 청년외교단이 조직화를 꾀해 나가는 7월 초순경, 안재홍은 중앙부의 총무로 추대되어 청년외교단에 가입하였고, 이로써 청년외교단은 2인 총무제를 갖추어 본격 활동을 전개하였다. 안재홍은 이병철과 함께 청년외교단의 총무로서 이 단체를 지도하였는데, 안재홍은 강령·규칙 등 운영의 기초가 되는 문안 작성의 일을 주로 맡았으며, 이병철은 자금과 조직을 담당하였다. 안재홍을 비롯한 청년외교단의 중심인물들은 1919년 9월, 倍達靑年團으로 조직을 확장·개편하기로 결정하였고, 10월 하순경에 조직을 개편하려는 준비에 착수하였는데, 11월 말에 청년외교단의 조직이 발각되어 계획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안재홍이 검거된 날은 11월 27일이었고, 이 사건으로 3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1922년 6월 9일 대구 감옥에서 출옥하였다. 혹심한 일제 지배하에 “전후 9차에 걸쳐 7년 3개월의 옥고”의 출발이었다.
목차
Ⅱ. 1919년 전반기 :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참여한 배경·계기
1. 낙향과 시국대책 강구
2. 3·1민족운동, 傳聞과 목격
3. 上京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식 전문
Ⅲ.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동
1. 가입 시점과 계기
2. 활동 내용과 피검, 최초의 옥고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