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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시기 察擧 관료의 출신지와 任官

원문정보

The study on the native place of bureaucrat from cha-ju(察擧) system in the Later Han dynasty

후한시기 찰거 관료의 출신지와 임관

閔厚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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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article is a study on cha-ju(察擧) system, and it was one of the recruiting bureaucrats systems in Han Empire. The conclusion is as follows. First, when it changed from the Former Han Dynasty to the Later Han Dynasty, the number of officials from cha-ju system has increased more than 4.5 times. It can be seen that the method of selecting officials has changed from military exploits or the selection of son of high-ranking officials to recommendation. Second, the number of item’s of the cha-ju system decreased. There were 14 items in the Former Han Dynasty, but they fell to 11items in the Later Han Dynasty. It is thought that the number of the officials from cha-ju system in the latter Han dynasty increased a little more than 4.5 times compared to the Former Han dynasty, but the decrease in the number of cha-ju‘s items was caused by the gradual readjustment of the system around Xiaolian(孝廉: a man of filial piety and integrity to his parents) and maocai(茂才: a man of talent) as the result of the transition from the Former Han dynasty to the latter Han dynasty. Third, the Former Han dynasty considered personality a little more important than ability in the selection of officials, the ratio was 54.3 percent (personality): 45.7 percent (ability). The Later Han dynasty considered personality far more important than ability in the selection of officials, the ratio was 77.8 percent (personality): 22.2 percent (ability). Fourth, from the Former Han dynasty to the Later Han Dynasty, The number of officials from north of the Hwanghe river has decreased, and the number from south of the Hwanghe river has increased.

한국어

이 글은 後漢제국의 官僚制가 察擧 인원수, 察擧 항목, 被察擧者들의 출신지라는 측면에서는 어떤 양상을 띠고 있었는가를 규명한 글이다. Ⅱ장에서는 우선, 『東觀漢記』, 『三國志』, 『八家後漢書輯注』, 『華陽國志』, 『後漢書』, 『隸釋』, 『漢碑集釋』 등에 나타나는 후한의 피찰거자 327명, 『漢書』, 『後漢書』, 『華陽國志』 등에 나타나는 전한의 피찰거자 72명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前漢에서 後漢으로 이행하면서 찰거자의 수가 4.5배 약간 넘게 증가하였으며, 選官 방식도 전한 초기에 중시되었던 任子, 軍功 등의 방법에서 점차 察擧로 옮겨갔음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찰거 항목에서는 후한에서는 孝廉, 賢良方正 등 11개 항목이 나타나고, 前漢시기에는 孝廉, 賢良 등 14개 항목이 나타나, 후한에서는 찰거자의 수가 전한에 비해 4.5배 약간 넘게 늘어났지만 찰거 항목은 오히려 간소화됨을 살펴보았다. 또한, 전한과 후한에 보이는 찰거의 항목과 횟수를 인성과 능력으로 이분하여 정리한 결과 前漢에 비해 後漢에서 능력보다는 인성을 훨씬 중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Ⅲ장에서는 후한의 피찰거자의 출신지를 조사하고 이를 전한 피찰거자의 출신지와 비교하여 피찰거자의 출신지라는 측면에서는 전한과 후한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먼저 冀州, 並州, 徐州, 幽州 지역에서 피찰거자의 수가 줄어들었으며, 이들 지역은 주로 현재의 황하의 북쪽지역 중에서도 현재의 산서성과 그 동쪽 지역으로 이들 지역에서 被察擧者의 비중이 전한에서 후한으로 가면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徐州의 피찰거자 비중이 감소한 것은 徐州를 중심으로 한 前漢 지배집단이 전한에서 후한으로의 정권 교체 과정에서 주도권을 상실했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다음으로 전한에서 후한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피찰거자의 수가 늘어난 지역들은 交州, 涼州, 揚州, 兗州, 豫州, 益州, 靑州, 荊州 등이며, 이들 지역은 대체로 황하 이남 지역이 많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는 전한에서 후한으로 이동하면서 관리들의 인적 구성이 지리적으로 상당 부분 남쪽으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마지막으로 찰거의 비중이 높은 지역을 살펴보았다. 前漢시기에는 豫州, 冀州, 司隸校尉, 徐州가 전체 피찰거자의 58.9%를 차지하여 정권의 중핵을 담당하였고, 이에 반해, 후한에서는 揚州, 豫州, 益州, 司隸校尉가 전체 피찰거자의 57.3%를 차지하여 이들 지역이 후한 정권을 지탱한 핵심지역이었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後漢 察擧 출신 인원과 察擧 항목
1. 察擧 인원의 변화
2. 察擧 항목의 변화
Ⅲ. 後漢 被察擧者의 출신지
Ⅳ. 결론
참고문헌

저자정보

  • 閔厚基 민후기. 중앙대학교 접경연구단 연구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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