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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후 낙동강 河口地域의 소금생산과 소금선운에 관한 연구

원문정보

The salt production and salt shipping in the estuary area of THE NAKDONG RIVER around 19th century

19세기 전후 낙동강 하구지역의 소금생산과 소금선운에 관한 연구

이근우, 신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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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In 1731(young-jo 7), the myungji and noksan salt fields became government salt production fields as a new source of income for a very bad harvest. The result was pretty successful. government as well as salt producer have got a great deal of profit from government salt production system. so, the government salt production system have continued to 1855(chul-jong, 6), about 120 years long. But as the government salt production system have continued, many problems have emerged. Most of them were marketing problems and fuel price problems. in order to assure the provision of rice to poorer families and to better utilize use the profit made in the myungji and noksan salt fields, the san san chang(蒜山倉) was established. The san san chang(蒜山倉) loaned 1,500 bags of rice to the salt producer of the myungji and noksan salt fields, took back 3,000 bags of salt from the salt producer of the myungji and noksan salt fields and utilized those salt in the villages near the nakdong river. The salt producer of the myungji and noksan salt fields could not sell their salts until the san san chang(蒜山倉) sold out the 3,000 bags of salt. so, the salt producer of the myungji and noksan salt fields have had many complaints. in the long run, the government salt production system was abolished in 1855(chul-jong, 6) When the government salt production system was continued in the myungji and noksan salt fields, the salts of those areas were transported by the salt ship(鹽船) named as the kwang-sun(廣船). the kwang-sun(廣船) could load from 150 bags of salt to 500 bags of salt.

한국어

영조 7년(1731)에 救荒을 목적으로 시행된 명지도의 公鹽場化는 국가에도 큰 이 익이 되었고 명지도의 鹽民들에게도 큰 이익이 되었다. 그러므로 영조 7년에 이어 영조 21년(1745)의 蒜山倉節目이 시행된 후 명지도의 公鹽制는 100여 년간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조 21년(1745)의 蒜山倉節目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 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판매문제와 생산비문제에서 제기되었다. 판매의 경우, 蒜山倉에서 거둔 3천석의 소금을 매진한 다음에야 명지도의 鹽民들이 소금을 판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蒜山倉의 관리들은 정해진 3천석뿐만 아니라 사적으로 소금 을 확보하여 판매함으로써 큰 이익을 얻었다. 나아가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 해 명지도 鹽民들의 소금판매를 계속 억제하였다. 당연히 소금을 팔지 못한 명지도 鹽民들은 점점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지도에서 소금이 대량 생산되면서 연료 문제가 크게 문제되었다. 煮鹽을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료가 필요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연료가 급격히 고갈되어 연료공급가는 폭등하였기 때문이다. 이외에 명지도 鹽民들에게 이것저것 각종 명목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종 6년(1855)에 명지도의 公鹽制 가 폐지되었다. 명지도의 公鹽制에 따른 문제가 많이 있었지만, 영조대부터 철종대까지 100여년 이 넘도록 명지도에서 公鹽制가 시행될 때, 명지도는 조선최고의 소금생산지로 떠 올랐다. 명지도에서 생산된 소금은 낙동강 뱃길을 따라 경상도 거의 전역에 판매되 었다. 낙동강을 왕래하는 배는 소금을 운반하는 鹽船과 일반화물을 운반하는 貨船 으로 나눌 수 있다. 낙동강의 운반선은 江船 특히 廣船이라고 하는데, 큰 것은 500 석 내지 230석, 작은 배는 150석 정도를 실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배들의 吃水는 1척 5촌에 달하는 것도 있었으나, 대개는 1척 2촌이었고, 소강지점은 대체로 왜관이었 다. 왜관 이상의 상류로 운반할 때는 작은 평저선을 이용하였다. 이 같은 명지도의 소금생산과 낙동강의 물류는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해양수산업이자 해양물류산업 이기도 하였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낙동강 하구지역의 소금생산
2-1) 명지도의 지리적 위치와 18세기의 公鹽場化
2-2) 19세기 公鹽制의 변화와 생산관계의 변화
3. 낙동강의 소금선운
3-1) 낙동강의 소금배
3-2) 소금배의 규모
3-3) 낙동강의 수로와 포구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이근우 Rhee, Kun Woo. 부경대 사학과 교수
  • 신명호 Shin, Myung Ho. 부경대 사학과 조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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