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The examination about the description of the South Japan in the article of Samgukyusa Geumgwan-sung’s Pasa stone pagoda
초록
영어
The Gaya could not have been development with the centralizing unitary state unlike neighbor’s the Backje and Silla. Therefore The Gaya was united with the small countries. These countries had solved through a diplomacy and trade of the leading country. The Gaya had done trade with the Japan(Wa) at an early age, and then it would have done take advantage of th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Japan(Wa) their countries living Japanese. One side, the pepole of the Silla at the time of the King Nulji in the same time the central part of the fifth century at governing the King Jilji of the Geumgwan-guk(Garak-guk, Gimhae) had been experianced pain with the frequent invasion of the Japanese. And the Buddhism had been spread to a private house about that time. Therefore, also in the area of the Gaya near by the Silla have been anticipated the invasion of the Japanese getting out of the control.
한국어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의 왕후사 창건 기사에는 금관국의 질지왕이 재위 2년(452)에 사찰을 건립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봉복(奉福) 및 왜의 진압 문제가 기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의 왕후사 창건 기사 및 찬(讚)에 왜와 관련된 설화가 기술된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사찰 창건 당시는 물론 삼국 유사 찬술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백제나 신라와 달리 주변 소국들을 통합해 중앙집권적인 단일국가로 발 전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국가들은 자체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무장 인력의 부족을 연맹 주도국과의 외교․교역 등에 의지하여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가야는 일찍부터 교류하던 왜와도 무역의 이익이나 철을 공급 해 주고 그들로부터 부족한 인력을 수입하여 자국의 방어나 공격 등에 활용했을 가 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통해 가야가 자국에 거주하던 왜인들을 통해 대왜관계에 이용했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런데 백제가 왜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파견한 사실은 있다. 그러나 가야 역시 왜와의 교류를 위해 왕족과 같 은 고위층 자제들을 상대국에 파견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에 비해 신라와 비교적 가까운 가야지역에는 왜구의 존재 가능성을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신라는 침구(侵寇)나 인질이란 명목으로 자주 왜의 공격에 시달린 역사 적 경험이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5세기 초반에 이르러 가야에 대한 주변 여 러 나라의 영향력이 커지고 병합도 추진되면서 백제보다 상대적으로 근접거리에 위 치한 김해의 금관국이 내륙의 다른 가야제국보다 왜로부터의 침구를 좀더 많이 겪 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신라와 달리 김해의 금관국이 왜구의 피해를 보았는 지에 대한 여부는 사료상에서 확인할 수 없다. 금관성파사석탑조에 등장하는 질지왕은 5세기 중반에 재위하여 42년간 김해의 금관국을 통치한 임금이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서는 눌지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건국 초기부터 계속된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변방의 백성들이 피해를 당 하거나 금성이 포위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던 엄중한 상황이었다. 금관국의 왕 후사가 창건된 무렵에는 신라에서도 불교가 민가로 확산될 무렵이었다. 따라서 신라와 인접한 가야 지역 역시 민가에서는 불교문화가 널리 확산된 상황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왕후사는 금관국에서 허황후를 위해 제사 지내던 전통 적 사당이었거나 신사였다가 질지왕대에 사찰로 변경되어 복을 빌고 왜국을 진압하 는 등의 불교식 기복과 호국의 성지로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금관국은 변 한 구야국시절부터 왜와 공식적으로 화호(和好)관계에 있었다. 그러다가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김해의 금관국과 왜의 관계가 그 이전 과 사뭇 달라지면서 김해 지역에서도 신라뿐 아니라 금관국의 변경지역이나 무역항 등에서 바다를 통한 왜인의 침입으로 인해 인적․물적 피해를 당했을 것으로 판단 된다. 왜와의 무역은 주로 바닷길과 강을 통해 이뤄졌는데 금관국의 낙동강 하구와 왜의 대마도가 양 지역간 주요 거점이었다. 그런 만큼 왜의 공식 외교정책 방향에서 벗어나 이를 노린 왜인의 약탈 내지 노략질과 같은 범죄행위도 예상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5세기 이전 신라·가야와 왜국의 관계
Ⅲ. 왕후사(王后寺) 창건 기사 속 ‘남왜’의 실체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