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Korean nation, since the deprevation of national sovereignty by Imperial Japan, had made unceasing effort to recover the national sovereignty and to gain independence. Such will to recover the national sovereignty was expressed through the independence declation. Among the many independence declations, the Daehan Independence Declaration is noteworthy which was expressed in Gilrim, Manchuria. It is because the Declaration was expressed by the leaders of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Manchria area, which was regarded as the main stream of the armed struggle. Adding to that, it is because the Declaration set up the ‘armed blood-war’ as the main ways and mean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over the dimension of demonstration movement. The considerable number of signer of the Declaration were the believers of Deajongkyo acting in Manchuria, and included the armed strugglers or their supporters. It can be understood that such will for recovering sovereignty was succeeded in the personal pedigree by Sungmyunghoi Declaration(1910), Dongjesa(1912) and the Deadongdangyul Declaration(1917), in which Deajongkyo-related persons were involved deeply Manchuria was the old territory of the korean nation and the cradle of korea history and sprit. When the nation sovereignty was deprived by Imperial Japan in 1910, a number of national movement leaders noticed Manchuria. there, koreans began to settle down after 1860s and set up their economic foothhold, moreover Manchuria was out of the Japanese reign. The independence movement strategies of the national movement leaders were to set up base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korean soceity in Manchurian and Russian areas, and on these bases, to establish a military school and educate independence army. The reason for the activated armed struggles in Manchuria is found in the existence of korean society. The recuiment of military funds and supply of manpower for the independence army were achieved wholly through their hands. The armed independence struggles in Machria include the Bongodong War and Chungsanri War, and include the painful failures such as the Kyungsinchambyun and Jayousi chambyun. The remaining independence armies in Manchuria settled the Manchurian situation after Kyungsinchambyun and reconstructed a new independence army. As a such result, in the middle 1920s, a military government was set uo in Manchurian composed by three departments such as Chameuibu, Jeongeuibu and Sinminbu. Thereafter the three departments organized the Hangukdokripdang and Chosunhyukmyungdang in the North-Manchurian area, and as each party's army, organized Hankukdokripkun and Chosunhyukmyungkun. After the Manchuria Event happened, they operated the Korean-Chinese alliance army with the Chinese National Salvation Army, and continued the armed struggles toward the Imperial Japan. Since the middle of 1930s a part of them transfered into the North-east Anti-Japan Allied Army, and an other part entered China and became the root of the Hankukgwangbokgun. It can be very significant that such a series of the armed struggles in Manchuria and Russia were carried out mainly by personnels who signed the 'Deahan Independence Declaration'.
한국어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한 한민족은 줄기차게 국권을 회복하고 독 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국권회복의 의지는 독립선언서를 통해 표출되었다. 수많은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지만 그 가운데 만주 길 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은 무장투쟁 의 본류라 할 수 있는 만주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주체가 되어 발표 된 것이라는 점, 처음부터 시위운동의 차원을 넘어 ‘무장혈전’을 독립 운동의 방략으로 설정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선언서의 서명자들 상당수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종교인들 이고, 또한 무장투쟁가이거나 혹은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국 권회복의 의지는 1910년 성명회 선언, 1912년 동제사, 1917년 대동단 결선언으로 인적 계보를 이어 오면서 대종교 계열의 인맥이 깊이 관련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만주는 민족의 고토이며 민족의 역사와 정신의 발상지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많은 민족운동자들은 만주를 주목했다. 이 곳에는 186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 련하고 있었고, 일제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다. 만주일대와 러 시아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이를 기반으 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것이 민족운동자들의 독립 운동 전략이었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한인사회라는 실 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자금 모집, 독립군 병력 조달 등이 모두 그들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은 봉오동전투, 청산리전 투 같은 성공한 투쟁도 있었고, 경신참변, 자유시참변 같은 실패의 고통 도 있었다. 만주에 남아있던 독립군들은 경신참변 이후의 만주 사태를 수습하고 새로운 독립군단을 재건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에는 만주지 역에서 군정부의 역할을 수행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가 정립하 게 되었다. 삼부는 이후 북만주지역에서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을 조 직하고 각각 당군(黨軍)인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 이들 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이후 중국 구국군(救國軍)과 함께 한․ 중연합부대를 운용하면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이 가운데 일부가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고, 일부는 중국 관내로 들어가 한 국광부군의 뿌리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만주, 러시아지역의 무장투쟁이 상당수 「대한독립선언 서」에 서명한 인물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목차
1. 들어가는 글
2. 「대한독립선언서」 작성
1) 작성 경위
2) 서명자의 성향
3. 만주 무장투쟁의 배경, 한인사회
1) 한인사회 형성
2) 독립운동기지 건설
4. 만주 독립군의 무장투쟁
1) 북간도지역의 무장투쟁
2) 서간도지역의 무장투쟁
3) 독립군의 북정과 통합운동
5. 나오는 글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