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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관련 만인소의 정치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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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Significance of Maninso Related to Crowned Prince Sado

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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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Joseon advocated for Gongron politics. However, after conflicts between factions intensified in the era of King Sukjong, Gongron was never free from the bad name that it was merely the opinion of the faction. In particular, after Hwanguk when the kings emerged to the front of politics, it was up to the king to decide whether the so-called Gongron was in fact the actual opinions of the people or not. And in some cases the king used Gongron himself to carry his political point, which is well represented in the two Maninsos on Crown Prince Sado submitted by Yeongnam Nam-in. The first Yeongnam Maninso requesting the exoneration of Crown Prince Sado was well received by King Jeongjo. In the political situations of the time, it was difficult for Jeongjo to peremptorily exonerate Sado, and so he sought to foster loyal retainers to do so, during which process Yeongnam Nam-in were selected. Proclaiming that the majority of Yeongnam Nam-in are unrelated to Musinran, Jeongjo cleared their name as traitors. On the favorable orders of King Jeongjo, Yeongnam Nam-in responded by submitting a Maninso requestng the exoneration of Crown Prince Sado, using Seong-han Ryu and Gu-jong Yun incident as a great opening. The actions of Nam-in placed their cause on Imoeuiri, through which they wanted to make their way back into the central politics. Jeongjo also used the Maninso to lead central politics into the direction he desired. However, the mood overturned after the sudden death of Jeongjo. Byeokpa faction, which came to power after the enthronement of King Soonjo, ousted personage related to Imoeuiri. The Yeongnam Nam-in were not given the opportunity to make their way back to central politics. But they did not lose their hope to return to central politics, and attempted to make their comeback in the year of the 120th anniversary of Crown Prince Sado’s birth. On the agenda of presenting additional posthumous titles to Sado and King Jeongjo, they suggested that Sado be honored as a king, based on the pretext of the fidelity and volition of Jeongjo. They sought to strengthen their cause and position by bringing up again the issue of Imoeuiri. However at the time, the political logics established during the era of Jeongjo, such as Imoeuiri or Shinimeuiri, were no longer considered important. There also were skepticisms on the effectivity of Maninso amongst Nam-in. In this light, it took almost four months to submit the Sangso, compared to that of 1792 when the entire process from discussion to submission only took 15 days. Also, their intention or purpose were unrelated to the political intention or purpose of the king or the ruling clique, and they were instead criticized for causing disturbance in political stage by bringing up the issue of Euiri again. they were able to avoid banishments thanks to the clemency of King Cheoljong. Even though Maninso was not accepted, it worked as the central part to solidify Yeongnam Nam-in politically and socially.

한국어

조선은 공론정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숙종대 이후 당론이 격화되면서, 공론은 당론 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특히 국왕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환국 이후로 는 공론의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국왕에게 있었다. 이 때문에 국왕이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공론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영남남인들이 사도세자와 관련해 올렸던 두 차례의 만인소였다. 1792년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구하며 올렸던 첫 번째 영남만인소는 정조로부터 매우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정조는 사도세자 신원이라는 숙원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우익 을 양성하고자 했고, 영남 남인이 그 대상이었다. 정조는 무신란과 대다수 영남 남인이 무관하다는 점을 천명함으로써 영남 남인이 역적으로 지목되었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와 같은 정조의 조치에 영남 남인은 1792년 류성한, 윤구종 사건을 기회로 사도세자 의 신원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리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이는 영남 남인이 자신들의 명분을 임오의리에 두는 것이며, 이를 통해 중앙 정계에 복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조 역시 영남 남인들의 만인소를 계기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순조 즉위 이후 집권한 벽파는 임오의리와 관련된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영남 남인의 중앙 정계 복귀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영남 남인은 중앙 정계에 복귀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사도세자 탄생 2주갑을 기화로 다시 한 번 복귀를 꾀하였다. 그것은 사도세자와 정조의 휘호를 추가로 올리는 문제를 계기로, 사도세자를 추존하자는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임오의리의 제기를 통해 자신들의 명분과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 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임오의리나 신임의리와 같은 정조대의 정치논리는 더 이상 중요 한 명분이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남 남인 내부에서도 만인소의 효용성에 회의적인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논의에서 상소 봉입까지 15일밖에 걸리지 않았던 1792년과 달리, 이때에는 거의 4개월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영남 남인의 의도나 목적 은 국왕이나 집권 세력의 정치적 의도나 목적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결국 사도세자 2주갑을 맞이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던 영남 남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조정 대신들의 강력한 반발과 처벌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하는 것을 피하 고자 했던 철종의 무마로 무거운 처벌은 피하였다. 영남남인은 임오의리 제기를 통해 정치적으로 재기할 가능성이 적어도 철종대에는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만인소가 아무런 효과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계에서는 별다른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지만, 향촌사회에서 영남남인의 결속력이나 위상을 강화하는 데는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1792년 사도세자신원만인소의 정치적 배경
Ⅲ. 1855년의 정국과 사도세자추존소의 봉입(捧入)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이욱 Lee, Uk. 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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