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During the Donghak Anti-Japanese War in the fall of 1894(甲午) both the North Corps(北接軍) and the South Corps(南接軍) fought against the Japanese invaders and the subdued Korean government forces. However, the war history has been written focusing on the role of the South Corps led by General Jeon Bong-Jun(全琫準), whereas the tracks and achievements of General Son Byeong-Hi(孫秉熙), the Commander of the 1st Division(1隊,甲隊) of the North Corps have rarely been discussed. The role and contributions of the 2nd Division(2隊,乙隊) who conducted a series cooperative battles for them have mostly been ignored. Son’s 1st Division, mostly recruited from the South Han River(南漢江) basin, defeated a half of the Japanese platoon on the 6th of the 10th month at Goesan(槐山), while heading for Boeun(報恩), where Donghak Center(大都所) was located. The victory was due to the rear attack by the 2nd Division from the upper Geum river(錦江) basin led by the Detached Forces(別動隊) armed with Remington rifles. The two Divisions assembled at Boeunin Boeun(報恩) on the 9th-11th to organize the North Corps, and moved to Cheongsan(靑山) on the 12th, where the Provisional Donghak Center(臨時大都所) was located. At the ceremony of march on the 14th, Donghak Leader Choe Si-Hyeong(崔時亨) appointed Son as Commander-in-Chief of the North Corps, and dispatched a note to General Jeon that Son would lead the 1st Division to Gongju(公州) to join Jeon’s entry operation. Jeon in turn sent an ultimatum on the 16th to the Governor in Gongju as Commander-in-Chief of the two Corps. The 2nd Division was also dispatched to Jimyeongjang(芝明場) to counter the staunch military base Jinnamyeong(鎭南營) in Cheongju(淸州). As Jeon’s Division at Nonsan(論山) headed north for Noseong(魯城) on the 19th to attack on Gongju, Son at Cheongsan also led his forces westward to Okcheon(沃川). Jeon sent a note directing Son to join the entry operation to Gongju on the 24th. On the 23rd when Jeon’s Division attacked on Yiyin(利仁) in the southern suburb of Gongju without success, Son’s troops also marched to a field near Handari(大橋). The next morning a half of the government battalion in Gongju crossed the Geum, and turned eastward to Handari, and expelled the 1st Division. led by Son Jeon’s Division fought all day against the defending forces at the east mountain pass(陵峙) of Gongju waiting for Son’s 1st Division, but they could not come due to the defeat at Handari. In the evening the main wing of the Japanese Westway Company(西路軍) led by Captain Morio(森尾雅一), and the government forces led by the Commander-in-Chief Yi Gyu-Tae(李圭泰), crossed the Geum and entered into Gongju. In the early morning of the 25th, the Japanese Captain Morio stationed at the east mountain pass. Jeon’s Division launched a series of attacks, but the defending army fought back successfully. Son’s Division also confronted with Yi’s forces near the North Gate all day, and launched an abortive surprise attack in the evening. There was virtually no strategic alignment between the two Divisions. On the 26th Jeon’s Division retreated to Gyeongcheon(敬川). Son’s Division retreated to Yiyin(利仁) the next day. On the 28th Jeon’s and Son’s Divisions conducted ceremonies respectively marking the birthday of Choe Je-Wu(崔濟愚) the founder of Donghak(東學). The next day they launched attacks on Gongju, and almost entered into it in the late afternoon. but they had to retreat in the evening due to the storm. The two generals met at Nonsan(論山) for the first time in early 11th month, and set up a Unified Command On the 8th-12th of the 11th Month, Jeon’s Division along with the 2nd Division of the North Corps launched series of entry operations to the south mountain pass(牛禁峙) etc. without success. Son’s 1st Division also did the same through the pass of the west mountain (鳳凰山). General Kim Gae-nam(金開男), the leader of the East Division(左道軍) of the South Corps, did not join the entry expedition to Gongju along with the West Division(右道軍) led by Jeon. Kim’s Division independently attacked on Cheongju(淸州) on the 13th only to fail. In comparison, the two Divisions of the North Corps cooperated with each other fairly well, for most leaders were well equipped with Donghak thoughts. It is remarkable that the 2nd Division joined Jeon’s entry operation on the 9th to the south mountain pass(牛禁峙) and that etc. Notably they also attacked the Japanese Midway Company(中路軍) on the 14th at Yeonsan(連山), so that the Japanese could not go to Gongju in time to locate Jeon’s forces at Noseong between the two fires of the Japanese. Thus Jeon’s forces could retreat to Nonsan on the 15th without being annihilated, and reunited with the 1st Division. It is desirable that the contributions of the North Corps, including the series of cooperative battles by the 2nd Division along with the Detached Forces, should be reflected upon the Donghak war history.
한국어
1894(甲午)년 가을 척왜항전에서 남북접 동학군이 함께 싸웠는데도 역사에서는 전봉준의 호남우도군 위주로 기술했고, 손병희가 이끈 호서동학군은 소홀히 취급했다. 북접군에는 전봉준 군과 공주 원정을 한 손병희가 이끈 남한강 동학군이 있었고, 청주 진남영에 대적하며 일본군과 싸운 금강상류 동학군이 있었다. 9월 18일 총기포령 후 동학교단의 손병희는 충의포를 중심으로 이종훈 이용구 등과 남한강 유역에서 동학군을 모집했다. 남한강 동학군은 10월 5일 음성 무극장터로 집결해 6일 보은으로 남하하다가 괴산에서 일본군을 조우해싸우던 중, 금강상류 동학군이 달려와 일본군의 배후를 쳐 패주시켰다. 두 동학군은 9-10일 보은으로 집결해 호서동학군을 결성했다. 최시형은 14일 청산에서 출정식을 열어 손병희에게 대통령기를 내리고 전봉준과 합세하여 공주성을 치라고 명령했다. 전령을 전봉준에 보내 손병희가호서동학군 1대(甲隊)를 이끌고 가 합세할 의사를 전달했다. 전봉준은 그 전갈을 받고 16일 논산에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양호창의영수 명의로 격서를 보냈다. 최시형은 금강상류 동학군을 이끈 손천민을 교단에 남게 하고 그의 송산포 동학군을 양성한 이종만 별동대장을 선도로 오일상의 문의포, 강건회의회덕포 동학군 등을 지명장(芝明場)으로 보내 2대(乙隊)를 강화해 청주 진남영에 대적하게 했다. 19일 전봉준 군이 논산에서 북상하자 손병희는 청산에서 1대(甲隊)를 이끌고 옥천으로 갔다. 전봉준은 21일 세성산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하고 천안에당도한 관군 일본군이 공주로 내려올 것에 대비해 옥천에 와있는 손병희에게공주성 ‘북문외(北門外)’로 가 함께 공주성을 치자고 전갈을 보냈다. 손병희 군은 23일 새벽 옥천을 떠나 저녁에 한다리(大橋) 인근 ‘한솔벌’에 도착했으나, 24일 아침 홍운섭이 이끄는 경리청 군 350여 명의 기습을 받고 패퇴했다. 전봉준 군은 23일 이인에서 관군 일본군과 싸우고, 24일 아침 효포로진격해 성하영의 경리청군 2개 소대와 교전하면서 손병희 군이 오기를 헛되이 기다렸다. 저물녘 이틀 전에 천안을 떠난 이규태의 통위영 군과 모리오(森 尾)의 서로군 본대가 공주로 입성했다. 25일 오전 모리오 대위는 서로군을 능치 아래 고지에 두고 경리청군에 서로군 분대를 붙여 냉천 뒷산으로 진격하는 전봉준 군을 격퇴했다. 모리오는오후 2시 전봉준 군이 별것 아니라는 듯 서로군을 이끌고 금영으로 철수했다. 이규태의 통위영 군이 공산성 옆 납교 뒷산에 포진하고 각 진에 신호를 보내동시에 효포천을 건너 건너편에 있는 손병희 군을 공격했다. 동학군은 수성군에 비해 10여배나 많았지만 무장이 부실해 수성군에 밀렸다. 저녁에 백락완의 경리청 소대가 시야산의 전봉준 군 성채를 공격해 패퇴시켰다. 그 무렵손병희 군이 통위영 군을 공격해 공산성을 위협했으나, 시야산에서 돌아온 백락완 군이 동학군의 배후를 쳐 격퇴했다. 전봉준 군이 26일 경천으로 물러났다. 손병희군은 그날 2대(乙隊)가 지명진(芝明津)에서 중로군과 싸워 공주행을 막아낸 것을 확인하고 전봉준 군과 통해27일 이인으로 내려갔다. 28일은 교조 최제우의 탄신일, 전국 각 포에서 탄신제례가 열렸다. 홍주 청주 등지의 동학군도 제례를 지내고 관아 공격에 나섰다. 남북접 군도 28일 각기 교조탄신제례를 지내고 이튿날 공주성 공격에 나섰다. 전봉준 군은 공주성 동남 방면에서, 1대(甲隊)는 서변에서 봉황산 하고개로 공격해 금영을 5리까지 접근해 위협했으나, 밤이 되자 비바람이 쳐 논산으로 물러났다. 11월 1-2일 비가 내리다 개자 전봉준과 손병희가 비로소 논산에서 처음 만나 의형제를 맺고 합진했다. 그 와중에 2대(乙隊)는 중로군을 견제해, 3-7일 교단의 피난길을 열었으며, 중로군을 소백준령으로 유인해 지연작전을 벌였다. 남북접군은 6-7일 다시 공주로 북상했다. 8일 월성산에서 봉황산으로 장사진을 쳤다. 호서동학군 2대(乙隊)도 가세했다. 9일 전봉준 군은 우금치로 손병희 군은 봉황산 하고개로 공격했다. 밀집조로 돌격해 누차 진입을 시도했지만 좌절되었다. 10-11일에도 여의치 않았다. 전봉준 군은 12일 오후 비가 올조짐에 노성산으로 물러났다. 1대(甲隊)는 논산으로 갔고, 2대(乙隊)는 계룡산으로 갔다. 김개남의 호남좌도군은 전봉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공주성 전투에 합세하지 않다가, 13일 뒤늦게 청주성 공격에 나섰으나, 두어 시간 만에 패해 신탄진 유성 방면으로 물러났다. 전봉준 군이 12-13일 노성산에 유진할 즈음, 계룡산으로 간 2대(乙隊)는 중로군이 청산 금산을 유린하고 진산을 거쳐 13밤 연산에 이른 것을 알아냈다. 중로군이 공주로 북상하고 서로군이 공주에서 내려오면 노성산에 유진한 전봉준 군이 기각지세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2대(乙隊)는 14일 아침 중로군을포위 공격해 연산에 하루 더 머물러 있게 함으로써, 이튿날 새벽 전봉준 군이서로군의 공격을 받고 노성산에서 논산으로 퇴각할 여지를 마련했다. 호서동학군 1대(甲隊)는 전봉준 군과 합세해 공주원정을 했고, 2대(乙隊)는10월 24일 내포지역에 이종만 별동대를 보내 현지동학군을 도와 서로군 지대를 격파해 공주 전장으로 가지 못하게 했으며, 26-29일 청남지역에서 현지동학군과 함께 중로군을 막아내 공주행을 저지했다. 2대(乙隊)가 이런 협력적 전투로 외곽지역의 관군 일본군이 공주전장으로 접근해 배후를 치는 것을 막았는데도, 남북접 공주원정군은 관군 일본군에 대개 밀렸고 끝내 패배했다. 그에 비해 2대(乙隊)는 시종일관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였고, 더러 그들을 위기로 몰아넣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그 행적을 연구하고 공적을 평가하여 동학전란사에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목차
서론
1. 남접의 거병과 동학교단의 기포령
1) 일본군의 경복궁점령과 청일전쟁 발발
2) 남접 거병과 동학교단의 견제
3) 오지영의 거중조정
2. 호서지역 동학군 간의 갈등
1) 남접의 대부 서장옥 세력
2) 북접의 강자 손병희 세력
3) 남접 허문숙과 북접 신재련의 대리전
4) 청주성 전투의 전개
3. 호서동학군의 결성
1) 호서동학군 집결과 괴산전투
2) 보은 장내리에서 호서동학군 결성
3) 공주 원정을 위한 남북접간 약조
4. 호서동학군의 출정 진로
1) 호남동학군과 호서동학군의 동시 출정
2) 남북접 군의 능치 진입작전
4) 전봉준 대장과 손병희 통령의 회동
5) 공주원정군의 퇴로를 열어준 연산전투
결론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