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After Sinimoksa, the massacre of scholar in 1721 during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of Yeongjo, Noron carried on the rehabilitation of 4 ministers who were killed. Rebuilding Dongsan Seowon in Heungdeok, a lecture and memorial hall, was also discussed. It is the representative Seowon of Noron keeping a spirit tablet of Lee Min-seo and Lee Gyeong-yeo, Lee Geon-myeong’s father and grandfather who was one of ministers. For this political reason, it kept on being demolished and reconstructed. Hwang Yun-seok actively argued for the reconstruction of Dongsan Seowon that symbolized the political cause of Noron. It was on the morrow of Eulhaeoksa, the massacre of scholar in 1755. Since the political situation in Jeolla-do was going through the chaos, Royal Court of the Joseon Dynasty had need to establish the political cause of Noron winning the popularity of the people in Jeolla-do. So he who understood this situation worked on positive lines for the rehabilitation and reconstruction. Furthermore, he attended Ganghoe, a conference, of Goam Seowon in Jeongeup having kept a spirit tablet of Song Si-yeol the leader of Noron. This Seowon was very special place for Noron as an academic and political center. For Seowon was built on where Song Si-yeol died. This then Seowon focused on a sacrificial rite than the academic lecture, so Ganghoe was held by Noron in Gyeonggi who proposed it. The Ganghoe in Goam Seowon was managed by active participation of Hwang Yun-seok and Confucian scholar lived in Heungdeok and the nearby areas. Sajok, a nobleman or gentry, in Heungdeok including the Hwangs of Pyeonghae contributed to holding Ganghoe continuously. Hwang Yun-seok compiled Goamgangui, a book about attendee of Gaghoe in Goam Seowon, and Sohakgangui, a book about lecture contents of it. This Ganghoe was begun by Noron in Gyeonggi, but managed by Sajok in Heungdeok with Hwang Yun-seok. So the Hwangs of Pyeonghae could hold their place as Sajok of Noron in Heungdeok.
한국어
흥덕 평해황씨는 을사사화 이후에 황수평이 입향한 이래로 송시열의 학문을 사숙하고, 김창협과 교유하면서 학문적 기반을 닦으며 흥덕의 서인 사족으로 부상하였다. 숙종대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어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사족의 학맥과 정파의 분화가 불가피하였는데 흥덕 평해황씨도 이 무렵 노론 사족으로서 학맥과 입지를 다졌다. 경종과 영조가 즉위 과정에서 벌어진 ‘신임옥사’이후에 ‘노론사대신’에 대한 신원과 추숭이 진행되면서 흥덕에 있는 동산서원의 복설이 논의되었다. 동산서원은 이건명의 조부 이경여와 부친 이민서가 배향된 ‘노론 서원’으로 정국의 변동에 따라 훼철되거나 복설되었다. 황윤석은 ‘신임의리’를 상징하는 동산서원에 관심을 갖고 동산서원의 유생을 대표하여 관찰사에게 서원 이건과 그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후 황윤석은 김원행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경기 노론과 본격적으로 교유하였는데, 당시 김원행은 ‘노론사대신’의 후손으로서 노론의 정치적 명예 회복에 관심이 많았다. 김원행과의 학연을 맺은 황윤석은 1757년(영조 33) 9월에 동산서원에 이건명과 이관명을 추향하기 위해 통문을 지어 도내 각읍의 향교와 서원에 알리는 등 ‘노론사대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적극 행보하였다. 김원행과의 학연을 통해 노론 학맥을 맺은 황윤석은 노론 송시열을 배향한 정읍의 고암서원의 강회에 적극 참여하여 학문적, 정치적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송시열이 수명한 곳에 건립된 고암서원은 서인의 학문적, 정치적 거점이 되는 곳으로 건립된 이듬해 1695년(숙종 21)에 사액되었고, 인근 지역에 부임하는 관리는 물론 유력 인사들의 방문이 이어지는 노론계 인사들에게는 특별한 서원이었던 것이다. 당시 고암서원은 강학 보다는 제향에 치중하여 사우로써만 기능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재를 비롯한 경기 노론의 인사들이 제안하여 강회가 추진되었다. 당시 태인현감 조정과 이재의 호남 제자 양응수 등이 제안한 고암서원 강회에 황전과 황윤석은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강회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강회를 통해 평해황씨는 흥덕의 노론사족으로서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암서원 강회로 맺어진 경기노론과의 학연은 황윤석이 관직에 나간 뒤에 더욱 긴밀해졌으며, 평해황씨와 안동김문과 풍양조씨와의 세의는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그런데 흥덕의 평해황씨와 세의를 이어갔던 풍양조씨와 안동김문은 19세기에 세도정권의 핵심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이 세도가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평해황씨와 같은 지방의 노론 사족과의 연대와 유착이 그 기반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8세기 경기 노론은 ‘신임의리’를 불가역적 명분으로 확산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대해 노론 사족으로서 위상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호남 노론이 호응하므로써 세도정권의 지역적 기반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목차
Ⅱ. 평해황씨의 흥덕 입향과 노론 학맥
Ⅲ. 노론의 辛壬義理와 동산서원 정비
Ⅳ. ‘考巖講會’와 평해황씨의 역할
Ⅴ. 맺음말
<국문초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