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Current Situation and Tasks of Research on Tongsinsa
초록
영어
The diplomacy made by Tong-sin-sa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an official and unique channel, enabling contact with Japanese intellectuals. At the time, the Japanese could only come as far as Waegwan, Dongnae, and despite the 54 Mun-wi-haeng (consolation visits) from the Joseon Dynasty, they were more frequent than visits by envoys. Accordingly,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almost all exchanges between the two nations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performed through Tong-sin-sa. Obtaining information about Japan was also donethrough the diplomacy of Tong-sin-sa during that period. In this sense, the bilateral exchanges by Tong-sin-sa is an important subject in the understanding of the Korean-Japanese relationship during the Joseon Dynasty. Nevertheless, prior to the 20th century, domestic research on Tong-sin-sa was very insignificant in comparison to Japan, even in quantitative terms. Based on a study from 1980, there was a survey which claimed that there was 10 times more research done by Japan compared to Korea (Son Seung-cheol, 「Retrospect and Prospect of Research on Tong-sin-sa during the Joseon Period」, 『Research on the History of Korea-Japan Relations』16, 2002). Such a gap in research had the issue of generalizing Japanese-oriented perspectives. Although the conditions changed with more active research in Korea during the 2000s, it is difficult to say if the changes are sufficient, when the qualitative level of the research is also considered.
한국어
통신사의 왕래는 양국의 중앙정부 사이에 있었던 직접적인 교류였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는 의의는 양국의 정치ㆍ경제ㆍ문화 및 상호인식 등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 있었다. 조선후기통신사행은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접촉할 수 있는 공식적이면서도 유일한 통로였다. 당시 일본인은 동래의 왜관(倭館)까지밖에 올 수 없었고, 조선의 문위행(問慰行)은 54회로 통신사에 비해 횟수는 많았지만 역관을 중심으로 해 대마도에 가서 실무적 현안을 해결하는 사행이었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의 수도인 에도까지 왕래하며 일본의 지식인들을 광범위하게 만나 교류하는 일은 통신사행원만 가능했다. 따라서 조선후기 양국 교류의 거의 전부가 통신사행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 일본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는 것 또한 통신사행을 통해서였다. 이러한 점에서 통신사에 의한 양국의 교류는 조선시대 한일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의 통신사에 대한 연구는 일본과 비교해 볼 때 20세기까지에는 양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1980년을 기준으로 보면 일본의 연구가 국내의 그것에 비해 10배 이상 된다는 조사(손승철, 「조선시대 통신사 연구의 회고와 전망」, 『한일관계사연구』 16, 2002)도 있다. 이러한 연구의 차이는 일본 중심의 시각을 일반화시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에서의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양상이 달라졌지만 연구수준까지 고려해 보면, 아직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연구사적인 차원에서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교사적 연구의 필요성이다. 통신사의 경우 부경사(赴京使)와의 비교가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나아가 같은 시기 유구(琉球)의 청에 대한 진공사(進貢使)와 일본 도쿠가와막부에 대한 경하사(慶賀使), 베트남의 청에 대한 조공사, 청에서 조선ㆍ유구ㆍ베트남에 파견한 사절과의 비교도 필요할 것이다. 둘째,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보다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통신사가 조선과 일본 양국이 연출한 국제적 행위였던 만큼, 통신사의 연구도 자국 중심에서 보다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상호보완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셋째 자료에 관한 문제이다. 다양한 사료의 발굴과 충실한 사료의 이용이 요구된다. 통신사행 문화교류 활동에 관해서는 통신사행원들이 남긴 43종의 일본사행록과 180여 종에 달하는 필담창화집이 가장 중요한 일차사료이다.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필담창화집이 일본사행록과 비교검토하면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통신사행 연구에서 주제의 편식성을 벗어날 것이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학제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통신사행원들의 필담의 주제와 문화교류 활동을 보면 문학ㆍ유학ㆍ역사ㆍ불교ㆍ의학ㆍ지리ㆍ그림ㆍ서예ㆍ음악ㆍ건축ㆍ음식ㆍ무용ㆍ복식이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접근방법도 다양한 학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는 그림이나 글씨, 음식 등 분야에 따라서는 문헌자료에 나오지 않는 부분도 많다. 이러한 분야에 대해서는 현지조사를 비롯해 학제적 접근을 해야만 실상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1. 조선시대 교린외교의 상징, 통신사
1.1. 조선 전기의 통신사
1.2. 임진전쟁 후 국교 재개와 회답사 파견
1.3. 조선 후기의 통신사
2. 한국에서의 통신사 연구 현황
2.1. 1960년대 이전
2.2. 1970년대
2.3. 1980년대
2.4. 1990년대
2.5. 2000년대 이후
3. 몇 가지 문제들
3.1. 통신사의 명칭 문제
3.2. 통신사의 성격 문제
3.3. 연속성과 단절성에 대한 문제
4. 앞으로의 과제
<참고문헌>
<조선시대 통신사 일람표>
<국문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