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A Study on the Book and Represented in the Work “KOKAIKENSYUROKU”
『항해헌수록』의 번각과 연구
초록
한국어
이 원고는 일본 동경도립중앙도서관 소장의 『航海献酬録』을 번각․번역하여 소 개하고 간단한 개요를 덧붙인 것이다. 1719년 9월 4일 오사카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서 5 일간 체재한다. 이 숙소에서 조선 학사와 일본 문인들과의 다양한 형태의 교류가 행 하여진다. 그 중 제술관 신유한을 비롯한 조선 학사들과 구마모토(熊本)에서 찾아온 미즈타리 헤이잔(水足屏山) 부자와의 학문적 교류의 모습은, 일본의 에도 시대에 행하 여진 조선통신사의 방일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적 모습이기도 하며 양국의 학문적 교 류를 돈독히 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肥後(지금의 구마모토 지역) 제일의 학자로 그 재능을 인정받은 미즈타리 하쿠센 (水足博泉)은 비록 단명하기는 하였지만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저술 활동을 통하여 후대에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일련의 경위는 13세 때 조선 학사들과의 만남을 통하 여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그의 명성 또한 조선통신사의 제술관 신유한으로부터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은 것에서 출발한 것이고, 그가 후대에 남긴 博泉이라는 호칭도 조선 학사로부터 명명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일본어
本稿は日本東京都立中央図書館所蔵の『航海献酬録』を翻刻し、またハングルで 翻訳して紹介したものである。その内容は、1719年9月8日から数日間、大阪の客舘 西本願寺で行われた、朝鮮通信使の製述官として訪日した申維翰をはじめ、三使の書 記らと熊本からやってきた水足屏山父子との筆談․唱酬の漢詩文贈答の様子である。 後日、「肥後第一の学者」とその才能が認められた水足屏山の子水足博泉は、惜 しくも早逝はしたものの、多くの門弟を養成し、著作活動を通して優れた学問的業績 を残した。こうような一連の経緯は、彼が十三歳の1719年、朝鮮学士との出会いから 出発したのであり、その学問的成果を通して名を広く知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 る。また、水足安方が後に水足博泉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博泉」という称号も朝 鮮学士の申維翰から命名されたということも興味深い。
목차
1. 들어가며
2. 1719년의 사행
3. 학문적 교류
4. 『航海献酬録』의 번각과 번역
<참고문헌>
<국문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