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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지역축제로서의 단오(端午)의 지속과 변화 - 서울[京城]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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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ntinuity and Change of Dano(端午) as a local festival in the occupation period of the Japanese Imperialism - Focused on Seoul (Keijyo) -

안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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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rituals traditionally performed at Dano were mostly changed or destroyed in the course of the modernization process of Korea due to the national holiday policy change. Especially, people in the cities who have various occupations unlike the farming people in the rural area do not place much importance on the times and seasons. To them national holiday policy is more important than the time and season of the nature. It is recorded that many rituals have been performed in Dano. In the occupation period of the Japanese Imperialism in Keijyo (Seoul), Dano was an important seasonal customs and various ceremonial rituals and plays were performed. It became gradually developed into a regional festival of the city. Although Dano, the fifth day of May in lunar calendar, lost its position as the traditional seasonal customs now, it used to be one of the four big holidays in Korea. In the occupation period of the Japanese Imperialism, it became the important seasonal customs and has undergone changes in the occupation period of the Japanese Imperialism. 'Maeil Shinbo' and 'Dong-A Ilbo' reported scenery of Keijyo (Seoul) at the seasonal customs most frequently among the contemporary newspapers and magazines. This study looked at the scenery of Dano of people in Seoul (Keijyo) who kept Dano as the traditional seasonal customs in the colonial situation and analyzed Dano in the occupation period of the Japanese Imperialism by dividing the period into three sub-periods. First, in the 1910s until 1919 when the March 1 independent movement took place, it was the period of the military government. During the rule of the Japanese military government, Dano festival was held in the city center centered on Nammyo and Dongmyo. In the festival Swing Play and Ssireum contests were held. People washed hair with water infused with sweet flags and went to worship dressed up with new dresses called Danobim. In the second period of 1920s (Period of Cultural Policies) the issuance of Korean newspapers such as 'Dong-A Ilbo' and 'Chosun Ilbo' was permitted. In these newspapers, various events and festivals of Dano, a traditional festive holiday of Chosun, were reported annually. Events related to Dano were sponsored or hosted by Newspapers and various local organizations. However, after the mid-1930s, the Japanese colonialism and national extermination policies became enforced in full scale, and negative stories about the Dano festival began to increase. In the 1940s when the shadow of the war is dark, Dano was no longer functioning as a seasonal festival, and had to suffer a decline. However, until 1940, Dano had been celebrated in major cities throughout the country holding various ceremonies, including the Ssireum and Swing contest. As a matter of fact, Dano was re cognized as an important seasonal holiday by people in Seoul (Keijyo).

한국어

전통적으로 단오에 행해지는 의례들은 한국의 근대화과정, 국가의 공휴일 정책의 변화로 인해 대부분 변화되거나 소멸되었다. 특히, 농업의 세시주기에 의존하는 농촌의 농민들과는 달리 다양한 생업을 가지고 있는 도시의 도시민들에게 일상의 세시주기는 국가의 시간정책에 의해 크게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단오에는 많은 의례가 행해졌다고 기록되는데, 일제강점기 서울(경성)에서 단오는 중요한 세시풍속으로 세시의례와 놀이가 행해져왔으며, 도시의 지역축제로서 점차 발전되어갔다. 지금은 음력 오월 오일인 단오가 전통적인 세시풍속으로서의 위치를 많이 상실했으나, 한국의 4대명절 중의 하나인 단오는 일제강점기에 중요한 세시풍속으로 자리매김해갔으며, 일제강점기의 각 시기별로 지속과 변화를 겪어왔다. 본고에서는 식민지라는 상황속에서도 고래로부터 이어온 전통적인 세시풍속으로서 단오를 지켜온 서울(경성)인들의 단오날의 풍경을 당시의 신문, 잡지들 중 세시풍속 관련 기사가 가장 많이 게재되었던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의 단오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1925년부터 1933년까지는 단오 지역축제의 절정기로 전국에서 크고 작은 지역축제가 활발히 개최되었다. 먼저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기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경성의 단오는 남묘와 동묘를 중심으로 그네뛰기와 씨름대회가 개최되었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거나 단오빔을 입고 참배를 하는 등 세시의례가 행해지는 세시명절로서 기능하였다.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한국어 신문 발행이 허가되면서 조선의 전통 세시명절인 음력 단오절의 각종 행사와 축제들이 매년 보도되었고, 단오 관련 행사는 각종 신문사나 각 지역의 여러 단체들로부터 후원을 받거나 주최가 되어 개최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과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음력 단오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증가되기 시작하였고,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밴 1940년대의 경성에서 단오는 더 이상 지역축제로서 기능하지 못하였고, 쇠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단오축제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나 1940년까지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음력 단오절을 맞이하여 씨름대회와 그네뛰기대회를 포함한 각종 크고 작은 세시 행사들이 꾸준히 개최되었고, 경성인들에게 음력 단오는 중요한 세시명절이자 지역축제로 인식되어 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일제강점기 의례와 놀이로서의 단오 세시(1910년-1919년)
 Ⅲ. 일제강점기 지역축제로서의 단오의 활성화(1920년-1939년)
  1. 지역축제로서의 단오의 변화상(1920년-1939년)
  2. 단오 지역축제의 절정기 (1925년-1933년)
  3. 단오 지역축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및 억압의 시작(1934년-1939년)
 Ⅳ. 일제강점기 단오의 쇠퇴(1940년-1945년)
 Ⅴ. 맺음말
 참고문헌
 

저자정보

  • 안주영 An, Ju-young.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박사수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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