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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아시아의 使臣 왕래와 符節 - 韓ㆍ中 관계를 중심으로 -

원문정보

Visits to China of Diplomatic Envoys and Authorization Tallies in Early East Asia : Focusing on the Relations with the Korean Peninsula

고대 동아시아의 사신 왕래와 부절 - 한ㆍ중 관계를 중심으로 -

송진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40집 2018.06 pp.329-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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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paper focuses on the symbols of the King’s authority in the possession of diplomatic envoys visiting China from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3rd to the 6th centuries. In particular, I analyze the tallies that diplomatic envoys used to prove their identities. During the Warring States period in China, diplomatic envoys carried these tallies symbolizing their status as the king’s representatives, which were the sole means of bestowing diplomatic and military rights on them. Eve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Qin and Han empires, the diplomatic envoys and generals under the command of the emperor carried them. The form of tallies changed little by little between the 3rd and 6th centuries, but their meaning as the symbol of the emperor’s authority persisted. Tallies were also accepted in Goguryeo and other states on the Korean peninsula prior to the 7th century. The ‘Copper Tiger Tallies’(銅虎符) that the Yae(濊) and Baekje kings received from the Chinese dynasties are good examples. Historical records are also constitute evidence that the King of Baekje received such tallies from the Chinese emperor. Nevertheless, these tallies were not used by the envoys dispatched to China from the Korean peninsula to prove their identities. Upon the founding of the Tang Empire, the system controlling the entry of diplomatic envoys from neighboring countries was improved relative to the system which prevailed during the previous period. For example, in countries that regularly sent envoys, such as Silla, ‘Copper Fish Tallies’(銅魚符) were issued and used according to the month. Therefore, the tallies used for the identification of foreign envoys in the Tang Dynasty were supplied only to neighboring countries that had established regular diplomatic contacts with the dynasty.

한국어

본고는 3~6세기 동아시아의 인적 왕래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왕조를 방문한 國使가 君命을 상징하는 信物을 소지하였는지 여부를 한·중 관계에서 사용된 符節을 중심으로 검토한 연구이다. 중국 고대사회에서 符節이 각국을 이동하며 활동하였던 사신들이 소지한 일종의 信物로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戰國時代이다. 진한시대에도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신이나 장군은 符節을 소지하였는데, 이 符節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독점적으로 소유한 황제의 권위를 표상하는 信物이었다. 漢代이후 수당이 성립하기 이전까지 符節의 형태는 각 왕조별로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皇命을 상징하는 信物로서 갖는 의미와 그 용도는 그대로 계승되었다. 唐代 이전 고구려·부여 및 한반도 諸國에서도 각 국의 왕은 중국 황제로부터 符節을 교부 받아 信物로서 사용하였다. 濊王과 백제왕의 虎符의 사례나 문헌에 중국 남조의 황제가 백제왕을 책봉할 때 銅虎符·竹使符 및 節을 교부하였다는 기록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節을 교부받은 왕의 경우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하고 경우에 따라 사신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한반도 諸國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 중국에서 받은 符節을 君命의 상징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곧 한반도에서 사용한 符節은 중국 왕조와의 관계에서 국왕이 갖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나타내는 信物이었으며, 중국 황제와 같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제3자에게 교부하여 君命의 상징으로 사용할 수 있는 信物은 아니었다. 唐 성립 이후 통신 체계가 세밀하게 정비되었고, 주변국에서 오는 조공사절단의 출입 관리 역시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가령 신라와 같이 정기적으로 입조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銅魚符를 교부하여 매 달 순서에 따라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邊關에서는 사신이 지참한 銅魚符를 통해 國使를 판별하고 관리하였다. 그러나 부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符信을 교부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唐代 외국 사신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符信을 확인했던 제도는 모든 사신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唐과 정기적인 通使 관계를 형성한 주변 국가에 대해서만 적용한 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목차

I. 머리말
 II. 使行과 君命의 상징인 符節
 III. 한반도 諸國에서 사용한 符節
 I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송진 Song, Jin.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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