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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 경상북도 지역의 종이연극(紙芝居)연구 - 농촌진흥운동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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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Kamishibai in the Colonial period Gyengsangbuk-do area

권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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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paper examines the case of Gyeongsangbuk-do, which produced a Kamishibai as a part of the colonial rural development campaign. Gyeongsangbuk-do was the first place to introduce Kamishibai in the history of colonial Chosun’s paper theater. In September 1936, the governor of Gyeongsangbuk-do, Kotaki Motoi decided to introduce Kamishibai to the provinces only three months after he was elected governor of Gyeongsangbuk-do. Gyeongsangbuk-do province was forced to increase its production more because of the increase of torture disputes, floods, and immigration of farmers. Governor Kotaki Motoki, who has stepped up to such a difficult environment, will use Kamishibai for the rural promotion campaign to stabilize the government quickly. It was found that the purpose of introducing Kamishibai was to raise the “social education effect” through supervision and censorship. The production and demonstration of Kamishibai in Gyeongsangbuk-do province were chaired by the leader of the Taoist Committee, Lee Gye Han. In December of 1936, the deputy industrial director made a script in the capacity of the chairman of the scenario, and at the same time selected the Kamishibai performer (practitioner). In addition, it is easy to deduce that all the works were carried out in three months within the three months since the publication of the Kamishibai “Gaengsaeng” and “Dohwa-dong” at the end of February 1937. It can be seen that the Kamishibai demonstration was carried out by the Koreans under the censorship and control of the government and became the media to which the Koreans moved directly. Intermediate bureaucrats or young men who did this were mobilizing the colonial power for ‘edification’, but also mobilizing the Koreans for ‘entertainment’. The Kamishibai “Dohwa-dong” in Gyeongsangbuk-do introduced the real problems of Gyeongsangbuk-do to its works and positively reflected the customs of Choseon. It’s a composition that conforms to the agriculture policy of Gyeongsangbuk-do, and a work that can see the control of the colonizer who collects daily life of the colonized person as labor. The excavation of this work provides important implications for understanding the reality of paper play in Gyeongsangbuk-do in the future.

한국어

본고는 식민지기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종이연극(紙芝居)을 독자적으로 제작한 경상북도의 사례를 고찰하였다. 경상북도는 식민지조선의 종이연극 역사에서도 일찍이 정책적으로 종이연극을 도입한 곳이다. 경상북도의 도지사 고타키 모토이(上瀧基)는 1936년 9월 경상북도 도지사로 영전한지 불과 석달만에 종이연극을 도정에 적극 도입하기로 한다. 그가 부임했을 당시 소작쟁의의 증가, 수해, 농민의 대거이민으로 인해 경상북도는 생산증강에 더욱 매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 부임한 고타키 지사는 도정을 빠르게 안정화하기 위해 종이연극을 농촌진흥운동에 적극 이용하게 된다. 그는 종이연극을 도입하여 감독과 검열을 통한 “사회교육적 효과”를 올리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경상북도의 종이연극의 제작과 실연은 도교화위원회 위원장 조선인 이계한이 맡았다. 1936년 12월 이계한 산업과장이 대본위원장의 자격으로 대본을 제작하였고, 그와 동시에 종이연극 실연자(實演者)를 선발하였다. 또 1937년 2월말에 ‘대망’의 종이연극 <갱생>과 <도화동> 2작품이 공개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3개월 안에 모든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는 것은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종이연극 실연은 관청의 검열과 통제 하에 조선인이 직접 이동하는 미디어가 되어 교화사업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수행하는 중간 관료 혹은 청년들은 ‘교화를 위해’ 식민권력에 동원되는 입장이면서도 ‘오락으로’ 조선인을 동원하는 중간자였던 것이다. 경상북도의 종이연극 <도화동>은 경상북도의 현실적인 문제점을 작품에 도입하였으며, 조선의 풍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또 경상북도의 농업정책에 부합하는 구성이며, 피식민자의 일상을 노동으로 수렴하는 식민자의 통제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발굴은 향후 경상북도 종이연극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목차

1. 서론
 2. 경상북도의 종이연극 - 오락과 교화의 사이
 3. 종이연극 <도화동>
 4. 결론
 참고문헌
 要旨
 ABSTRACT

저자정보

  • 권희주 Kwon, Hee-ju.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 조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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