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The Study of the Escort System when the King Went to the Mausoleum of the Late Joseon Dynasty
조선 후기 국왕의 능행시 시위체제 연구
초록
영어
The kings of the Joseon Dynasty periodically held frequent parades outside the palaces. The King's parade was held continuously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King's parade was going to the Royal tomb. The Parade of the King was escorted by the military soldiers of central army. The escort system of the military changed according to the change of the military system. The military system of the Joseon Dynasty has changed dramatically since the Japanese invasion. The emergence of the musket rifle, which was introduced in earnest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period, strengthened the infantry-centered military system rather than the cavalry. In the parade of the King, escorting was carried out mainly by military personnel carrying musket rifles. Since the parade of the king was a large-scale mobilization, resting places and roads were selected and prepared in advance. The roads used in the King's parade were not changed once decided. There was no reason to change the road because large numbers of people chose a road that was easy to travel efficiently. In addition, the King's parade was mobilized by local residents for the preparation of accommodation and maintenance of roads. Therefore, the parade of the king was a comprehensive national event, from the king to the people
한국어
陵行은 수백명의 군사들이 동원되는 대규모의 행렬로 그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은 군법이었다. 능행에 동원되는 馬兵이 말에서 내릴 때는 鳴螺를, 다시 말에 올라 탈 때는 吹螺를 사용하여 군사 작전과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므로 능행시 동원되는 군병을 움직인 진법에 대한 연구는 능행 행렬의 기본적인 모습을 살피는데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군제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왕의 능행에서 사용되었던 진법은 정도전이 저술한 『陣法』을 조선 후기까지 진법의 근간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능행시 시위진법은 도로에서 가마를 중심 으로 전후에 군병이 배치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진법에서처럼 方形이나 원형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행행의 대열이 주정소나 행궁에 머무는 경우에는 방형 의 형태로 作門을 이루었으나 이동 중에는 대가를 중심으로 한 진법이 주로 구사 되었다. 능행시 대표적인 진법으로는 五衛陣, 六花陣, 蜂屯陣, 鴛鴦陣, 五馬隊陣 등을 들 수 있다. 이 진법들은 능행에서 오위진을 중심으로 나머지 진법들을 뒤 섞어서 이용하였다. 능행시 대가를 중심으로 전후좌우의 군병은 정해진 군영에서 지속적으로 담 당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능행시 시위군에서 대가의 앞을 담당하는 前廂軍[駕前軍]은 훈련도감군, 後廂軍[駕後軍]은 어영청과 금위영군이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 다. 행행시 병조에서는 시위군병의 분담을 위해 능행 대열의 위치에 따라 군병을 배치해서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때 대부분 전례에 따라 시위군의 배치가 이루 어졌다. 그러므로 시위군이 시위진법을 습득하는 것이 보다 단순하고 전문적이 었음을 알 수 있다. 능행에서 진법의 구사와 함께 중요시 된 것이 능행로 선정과 행궁의 정비였 다. 도성을 벗어난 능행은 군대 행렬로서 하루에 30리를 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 었다. 그런데 도성을 벗어난 능행로는 협소하였다. 정부에서 이용하던 官路조차 협소한 상황에서 능행로의 정비는 당연한 행행의 순서였다. 능행로의 정비는 국 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넓이를 감안하여 정해졌다. 郊外와 城內의 도로가 다르기 는 했지만 가마가 지나는 넓이를 기준으로 능행로를 정비하였다. 능행로의 정비 와 관리는 지역 수령들이 담당하였다. 한번 선정된 능행로는 역대의 국왕들이 큰 변화 없이 반복해서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도성내의 大路를 제외하면 도성을 벗 어나는 능행이던, 원행이던 특별히 능행로가 매번 별도로 정해지지는 않았다. 도성을 벗어난 능행은 시간과 거리상으로 식사와 휴식, 숙박을 위한 장소가 필요하였다. 특히 당일 환궁이 아닌 능행을 하면 국왕만이 아니라 시위군도 육체 적으로 힘들었다. 시위군이 소지한 무장과 의장의 무게와 이동 거리로 인해서 길 에서 넘어지거나 처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능행로의 선정이 이루어지면 동시에 이루어지던 것이 행궁이었다. 행궁은 전국에 걸쳐 위치하였으나, 그 대부 분은 왕릉이 위치한 경기도에 있었다. 행궁은 지방 관아를 수리해서 사용하는 경 우가 많았으나, 화성행궁, 시흥행궁, 온양행궁처럼 국왕과 왕족을 위해 새롭게 마 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능행시 국왕의 시위는 군사 진법에서 도로, 숙박 시설에 이르기까지 해당 지역의 다양한 부분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현지인 이 총동원되는 군민일체의 왕실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목차
2. 능행시 侍衛陣法의 운영
3. 능행로와 행궁의 정비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