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Most established Karafuto researches have been done mainly on postwar compensation or Diaspora. And these cover the period from 1930s to the postwar era. Even though Diaspora research have to be based upon the historical context, there is a lack of research on immigrate to Karafuto of Korean before 1930s. Therefore, this thesis will examine immigration and settlement of Korean on documents of police administration and newspaper materials, and will consider the perception on Korean. Especially in 1917, Korean in labor group immigrated to Karafuto on ‘trial’ through ‘recruitment’ by enterprise. And immigrating of Korean became active because their work efficiency get recognition. From 1920s Due to Japan occupied the whole of Sakhalin, immigration purposes and methods of Korean were diversified. But the police authorities took a negative stance. Enterprises and the police authorities show position difference that Enterprises drew Korean labors through ‘recruitment’ and ‘instruction’ in the shortage of labor, whereas the police authorities devalued the labor by reason of ‘indolence’, ‘distrust’, ‘laziness’, ‘like gambling’, ‘indecision’, ‘poor sense of hygiene’, ‘ignorance’ and other reasons.
한국어
기존의 가라후토 연구는 전후보상 연구나 디아스포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패전까지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연구는 역사적 맥락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정작 1930년대 이전의 가라후토 조선인 이주에 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경찰행정문서와 신문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인의 이주와 정착을 살펴보고 여기에서 조선인에 대해 어떤 인식을 하였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1917년 조선인 노동자 단체가 기업에 의한 ‘모집’을 통해 처음으로 ‘시험적’으로 가라후토에 이주하였으며 이들의 능률이 인정되어짐에 따라 조선인 이주가 심화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 일본이 남북 사할린 전체를 점령하면서 조선인의 이주 목적이나 방식이 다양해졌고 치안당국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가라후토는 노동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기업은 ‘모집’과 ‘교도’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를 불러들였다면 치안당국은 조선인이 ‘나태’, ‘시의심(猜疑心)이 강함’, ‘유타(遊惰)’, ‘사행(射倖)을 선호’, ‘뇌동성(雷同性)’, ‘위생관념유치’, ‘무학’ 등의 이유로 노동의 가치를 절하하였다는 점에서 입장 차이를 보인다.
목차
2. 가라후토시대의 시기별 구분
3. 1917년을 기점으로 한 조선인 '모집'
3.1 가라후토의 노동자 부족 상황
3.2 '모집'을 통한 최초의 단체이주 조선인
3.3 조선인 기생의 이입
4. 1920년대 가라후토 조선인 인식
5. 마치며
참고문헌
要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