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Four-Sided Stone Pillar Buddhas Images in Gyeongju Chilburam(七佛庵) Hermitage on Mt. Namsan is one of the major works widely known and always mentioned when we discuss the history of Buddhist sculpture in unified Silla. The Buddhas Images are compared with those following the traditional style of Buddhas images in Northern Zhou Period(北周) and Sui Dynasty(隋) and employing some of the elements from new styles among the ones in Chang'an (長安) developed during early Tang in two divisions of the extraneous style of Buddhas images and the traditional style of Buddhas images. On account of these characteristics of its style, the Four-Sided Stone Pillar Buddhas Images in Chilburam Hermitage is assumed to have been made in the early 8th century. According to the analysis, in the Four-Sided Stone Pillar Buddhas Images in Chilburam Hermitage, the Bhaisajyaguru Buddhas images of the individual mudra are placed as main Buddhas in the east, and the rest, south, west, and north sides, those of the common mudra are arranged. Also, we can assume that it may have formed a complex structure in which they worshiped the Four-Sided Stone Pillar Buddhas Images as they walked around the sutra carved stone of The Merit and Virtue of the Past Vows of Invocating Medicine Buddha(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 Kr. Yaksayurigwangnyeoraebonwongongdeokgyeong) and enhanced their Bhaisajyaguru belief. The time when the Four-Sided Stone Pillar Buddhas Images in Chilburam Hermitage was formed was when there was severe national disaster resulted from natural disaster. The way to get over it was for them to practice Bhaisajyaguru belief grounded on The Merit and Virtue of the Past Vows of Invocating Medicine Buddha. We can suppose that they should have formed and worshiped the Four-Sided Stone Pillar Buddhas Images in Chilburam Hermitage in a way to practice Bhaisajyaguru belief.
한국어
경주 남산에 자리하는 칠불암 불상군은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사를 논할 때항상 언급되는 주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칠불암 불상군 중에 마애삼존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의 백미로 손꼽히는 석굴암 본존불상에 선행하는 작품으로 국제적인 당대(唐代)의 불상양식이 신라로 전래되었음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 반면 석주사면불상은 마애삼존불상과는 다른 양식특징을 보이는데, 이목구비와 상호를 정확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거나 어깨가넓고 가슴이 벌어져서 상반신이 다부져 보이는 등 이전시기 불상에서 볼 수 없는새로운 특징이 간취된다. 그에 비해서 대좌의 형식이나 상현좌의 표현, 광배의 형식 등은 전통적인 불상양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특징은초당대 장안지역의 불상 중에 북주와 수대 불상양식의 전통을 답습하면서 일부새로운 양식요소를 채용하고 있는 계통의 불상들과 비교된다. 즉 초당대 장안지역에서는 외래적인 불상양식과 전통적인 불상양식으로 이원화(二元化)되어 전개되었는데,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은 그 중 전통적인 불상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신라시대 불상 중에서 칠불암 석주사면불상과 같은 계보에 속하는 불상은그리 많지 않은데, 구황동석탑 출토 금제불좌상이나 경주 남산 용장사지 석조불좌상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이상 3구의 불상 중에서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이 고식의 양식특징을 가장 많이 갖고 있으며, 전형적인 초당양식의 불상과 가장 흡사한예는 구황동석탑 출토 금제불좌상이다. 또 용장사지 석조불좌상은 초당양식을 신라화하여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양식분석을 바탕으로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의 제작시기를 따져보면, 706년에 제작된 구황동석탑출토 금제불좌상이나 740년 무렵에 조성된 용장사지 석조불좌상과 같은 시기인 8세기 전반으로 판단된다. 8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신라중대에 제작된 불상은 드문 편이다. 따라서 이상 3 구의 불상은 신라중대 불상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상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불교조각사적 의의는 전통적인 양식 계통의초당대 불상이 신라중대에 신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기왕의 선학들의 연구를 통해서 신라중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거론된 안압지출토 금동삼존판불이나 칠불암 마애삼존불상에서 나타나는 인도에서 전래된 외래적인 영향이 짙은 초당양식의 불상이다. 하지만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의 양식적 고찰의 결과북주, 수대 불상의 전통적인 특징을 계승하는 초당양식의 불상도 8세기 전반 무렵에 신라로 수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중대 불교미술이국제적인 불교문화를 폭넓게 수용하여 이후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전성기를구가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마련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고하겠다.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은 동면의 불상만 원형의 지물을 들고 있어서 약사임을알 수 있지만, 그 외 나머지 면의 불상들은 수인이 모두 같으며, 각각의 존명을 구별할 수 있는 도상적 특징이 없다. 그래서 석주사면불상의 도상을 고찰한 기왕의연구자들은 이 불상을 사방불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특정방위의 불국토를 관장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존격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면불로 이해되기도 한다.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은 원형을 잃은 상태인데, 원래는 중국 남북조시대(南北 朝時代)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제작된 소위 아육왕탑이라고 불리는 복발형 지붕을 한 단층의 방형석탑과 같은 형식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한 형식의 석탑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일반적인 불탑이 아니라 특정한 신앙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중에는 탑신부 네 면에 각기 다른 도상으로 불상을 표현하고 있지만 조상기에는 이 불상들이 같은 존격을 나타낸 것임을 말해주는 ‘불상1 구’ 또는 ‘사면불상1구’라는 대목이 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면, 칠불암 석주사면불상도 모두 같은 존격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보주형 지물을 든 약사불상뿐만 아니라 그 외 나머지 불상들과 같은 수인을 결한 약사불상 예들이 같은 시기에 주변국가들에서 제작되고 있다. 그러므로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은 동면에 별인의 약사불상을 주존으로 그 주변인 남, 서, 북면에 통인의약사불상을 배치함으로써, 결국 약사여래의 편만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기존에 금강경(金剛經)으로 잘못 알려졌던 칠불암에서 수습된 석경편이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으로 판독되었다는 것도 석주사면불상이 약사여래를 상징화한 것이라는 해석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발굴조사 등의 연구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겠으나 아마도칠불암의 중심불전에서는 주요 예배대상으로 석주사면불상을 예경하면서 동시에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석경을 요잡함으로써 약사신앙을 극대화하는 복합적인 구조를 이루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은 왕경의 중심지이자 시조묘가 자리하는 등 성소로 중요시되었던 남산에 위치한다. 특히 이 불상이 조성된 신라중대는 국가에서 불사를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산과 같은 주요지역에는 국가의 재가없이 개인이 함부로 사찰을 조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칠불암 불상군이나 주변의 건축부재들의 규모나 기술적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석주사면불상은 국가적인 차원의 약사신앙과 연계되어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이 조성된 8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시기는 성덕왕이 재위하였다. 이 시기는 지진이나 태풍, 우박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하였고 흉작이 극에달해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렸으며 전염병까지 창궐하는 등 심각한 재앙을 겪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다방면의 구휼정책을 실시하여 국가적인 재난을 타계하고자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에 근거한 약사신앙을실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상황과 성덕왕의 불교적인 구휼시책에 비추어보면,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의 내용처럼 자연재해, 기근, 전염병 등의재난을 극복하고자 칠불암의 석주사면불상을 조성하고 예경함으로써 약사신앙을실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
Ⅱ.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의 양식특징과 편년
1. 칠불암 석주사면 불상의 양식특징
2.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의 계보와 제작시기
Ⅲ.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의 도상과 원형
Ⅳ.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의 조성배경과 신앙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키워드
- 석주사면불상(石柱四面佛像)
- 약사불상(藥師佛像)
- 남산 칠불암(南山 七佛庵)
-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
- 석경(石經)
- four-sided stone pillar Buddhas images
- Bhaisajyaguru Buddhas images
- Chilburam Hermitage on Mt. Namsan
- The Merit and Virtue of the Past Vows of Invocating Medicine Buddha)
- stura carved stone
- 石柱四面佛像(four-sided stone pillar Buddhas images)
- 藥師佛像(Bhaisajyaguru Buddhas images)
- 南山 七佛庵 (Chilburam Hermitage on Mt. Namsan)
- 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 (The Merit and Virtue of the Past Vows of Invocating Medicine Buddha)
- 石經(stura carved st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