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paper examines the influence of Wonhyo (617 – 686) on Korean Buddhism through his core ideology, that is, his understanding of Tathagata-garbha and Buddha-nature. According to Yogâcãra Buddhism, our Buddha-nature is inherently pure but is defiled by adventitious afflictions(āgantuka-kleśa). The dual structure of these aspects, the purity and the defilement of the Buddha-nature, is explained by the concept of ãlaya consciousness in the Yogâcãra school. Yogâcãra Buddhism focuses more on defilement because it can account for an unenlightened person’s present state of mind rather than the purity that describes everyone’s inherently undefiled state of mind as a Buddha-to-be. Conversely, Tathagata-garbha thinkers focus on purity while attempting to integrate both concepts into the perspective of purity. This perspective is well represented in their sutras, such as Baoxing lun (Ratnagotravibhāga-mahāyānôttaratantra-śāstra (寶性論), where they said, “every sentient being has intrinsically pure Tathagata-garbha.” Wonhyo viewed the structure of one mind, two aspects in The Awakening of Mahayana Faith as an excellent way to achieve unity between the Yogâcãra school’s ãlaya consciousness and the Tathagata-garbha thinker’s Tathagata-garbha. Instead of focusing on the similarities between the awakened state of mind and the unawakened state of mind, he focused on their differences and was able to offer a new perspective in unifying Yogâcãra and Tathagatha-garbha. It is significant that Wonhyo’s understanding of one mind, two aspects includes the intrinsically pure state of mind as well as the defiled state of mind. Because of Wonhyo’s influence, several books were published during the Unified Silla era (668–935). During the Koryŏ period(935 – 1392), Wonhyo was honored by Seon Master Uichon, with the title of National Teacher of Reconciling Dispute. His 44 books were recognized by the public and by many scholars of the era, such as Booshik Kim and Gyubo Lee, who venerated him in their poems. Chewon borrowed lines from Wonhyo’s works in two places in his book. During the Chosŏn era, Gujong Seo introduced six kinds of Wonhyo’s “Great Doctrine” in Zongyoa in his own book, Donmoonsun, for Confucian scholars to study. Suljahm Sisub Kim honored him in his poem and during the mid-Chosŏn era, Yooil and Uichum referred to Wonhyo’s Commentary for The Awakening of Mahayana Faith when they wrote Private Notes on the Awakening of Mahayana Faith. During the late Chosŏn era, when the doctrinal approach waned and the Seon(zen) approach began to make its mark, The Awakening of Mahayana Faith began to lose popularity and Wonhyo’s concept of Tathagata-garbha and Buddha-nature did not flourish. After the Chosŏn era, the Buddhist intellectual class focused on Huayan and Seon, ignoring the concepts of Tathagata-garbha and Buddha-nature. Although Wonhyo was ignored by the intellectuals, he remained a symbol of nationalism for the public, especially during the difficult times of war with Japan and China. During the late Chosŏn era and the Korean Empire, he was remembered in Korean history and revered by the public in many portraits, paintings, and stories.
한국어
이 논문은 분황 원효(芬皇 元曉, 617~686)의 주요 논지인 여래장 인식과 불성 이해가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 논구한 글이다. 불교의 유식사상에서는 ‘본성은 청정하지만[本性淸淨] 객진에 오염되어 있다[客塵所染]’는 ‘청정’(淸淨)과 ‘염오’(染汚)의 이중구조를 아뢰야식(阿賴耶識)을 통해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유식사상은 부처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본성청정’보다는 범부의 의식 상태를 해명하는 ‘객진소염’에 더 치중하였다. 반면 여래장(如來藏)사상은 ‘본성청정’에 입각하여 ‘객진소염’과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보성론』을 비롯한 유가행파의 경론에 ‘일체 중생은 여래의 태아를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有如來藏]는 구절이 나타나 있는 것처럼 범부를 부처로 만드는 수증론(修證論)에 집중해 있기 때문이다. 분황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일심 이문(一心二門) 구조를 유식사상의 아뢰야식과 여래장사상의 여래장(如來藏)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탁월한 체계라고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여래와 범부의 동일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이 둘 사이의 차이성을 강조하는 이론적 배경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가능태로서 여래와 범부의 동일성을 드러내는 ‘본성청정’과 현실태로서 여래와 범부의 차이성을 나타내는 ‘객진소염’의 구도가 두 사상의 입각점과 강조점을 모두 보여준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원효의 여래장 인식과 불성 이해의 지형에 영향을 받은 저작들이 일부 간행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 원효는 의천의 주청에 의해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존되었고, 그의 교장목록(敎藏目錄)에 44부의 저작 이름이 입장(入藏)되어 주목을 받았다. 김부식과 이규보는 시를 통해 그를 기렸고, 체원(體元)은 원효의 저술을 두어군데 인용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서거정(徐居正)은 『동문선』에 그의 6종의 『종요』(宗要) 「대의문」(大意文)을 실어 유자(儒者)가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설잠(雪岑, 金時習) 등은 원효를 기리는 시를 썼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유일(有一)과 의첨(義添)의 공부노트인 『기신론』 사기(私記)의 간행과정에서 『원효소』를 참고했을 정도였다. 조선 후기에 교학(敎學)이 쇠락하고 선학(禪學)이 성한 조선후기의 이력과정(履歷科程)에 『대승기신론』이 잠시나마 등장해 그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원효의 여래장 인식과 불성 이해도 이어질 수 없었다. 조선 이후의 불교 지식인들은 화엄과 선법에 몰입하면서 여래장과 불성 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효는 지식사회에서 존재감을 지니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왜란과 호란 등 국난의 위기 때마다 민중들 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지니면서 ‘민족의 상징’으로 되살아났다. 조선 후기와 대한시대(1897~남북한 통일)에는 원효를 기리는 영정과 벽화들이 그려졌고, 그에 대한 설화들도 산발적이지만 민중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목차
1. 서론
2. 여래장과 불성의 접점과 통로
3. 원효의 일심과 여래장 인식
4. 원효의 본각과 불성 이해
5. 한국인의 불성관에 미친 원효의 영향
6. 결론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