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本稿는 韓國(韓國人)의 「國語」이데올로기가 어떻게 形成되어 展開되어 왔는가를 簡略히 素描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本稿에서는 韓國에 있어서 「國語」란 用語가 使用되기 시작한 1900年 前後로부터 現在에 이르는 時期를 ①「國語」의 形成(1900年 前後), ②「國語」의 內面化(1910-1945), ③「國語」의 復權(1945-1950), ④또 하나의 「國語」의 境界(1950-現在)와 같이 4分해 보았다. 이와 같은 時期 區分을 想定한 것은 韓國의 「國語」이데올로기의 形成과 展開에 있어서 日本帝國主義의 同化政策이 密接하게 關聯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本稿의 立場이기 때문이다. 韓國人이 「國語」란 用語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0年 前後의 改化期에 비롯된 것으로 특히 1906年의 普通學校令은 「國語」의 登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前後하여 周時經의 論說과 著書에도 「國語」란 用語가 使用되고 있음이 주목되는데, 이것은 統監府의 主導에 의한 普通學校令과 당시 日本의 學校敎育에 사용되고 있었던 國語讀本에 의해 「國語」란 用語가 韓國 社會에도 受容되기 시작했음을 示唆하는 變化가 아닐까 추측된다. 그러나 韓國의 國權이 喪失된 1910年에 이르면 「國語」는 水面下로 潛伏하게 된다. 周時經의 『國語文法』이 이 時期에 이르러 『朝鮮語文法』으로 名稱을 바꾼 것은 象徵的인 事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日本帝國主義의 同化政策下에 놓여있었던 35年間은 단순히 「國語」가 水面下에 潛伏해 있었던 것이 아닌 「國語(コクゴ)」를 통해 「國語」의 에토스가 確立되어간 時期로 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國權이 喪失된 狀況에서의 「國語」는 國家語로서보다는 民族語로서의 性格을 강하게 內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國權 喪失期에 있어서의 「國語」의 展開 過程을 本稿에서는 「國語」의 內面化 過程으로 解釋하고자 했다. 이 時期에 일어난 이른바 朝鮮語學會 事件은 이와 같은 「國語」의 內面化가 초래한 象徵的인 事件으로 照明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45年의 解放 空間에서 「國語」는 그 무엇보다도 빠른 復權의 길을 걷게 된다. 1945年 11月에는 이미 『國語敎本』이 軍政廳 學務局에 의해서 發刊되고 있는데 이 때는 아직 政府樹立 以前의 段階이며 엄밀하게 말하면 「國語」가 國家에 앞서 復歸된 것을 意味한다. 이와 같은 「國語」에 대한 自己同一性이 暗黙의 前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民族語로서의 「國語」를 內面化할 수 있었던 歷史的 經驗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解放과 함께 展開된 歷史의 屈曲은 우리에게 統合된 「國語」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남쪽의 「國語」는 서울의 中産階級이 使用하는 標準語와 表裏關係에 있으나 북쪽의 「朝鮮語」의 實體는 勞動者와 農民을 비롯한 勤勞大衆이 使用하는 平壤의 文化語를 志向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는 資本主義的 民族語로서의 서울의 標準語와 社會主義的 民族語로서의 平壤의 文化語의 對立 속에서 또 하나의 「國語」의 境界에 直面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