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re was one year difference in Kanghang’s and NoIn’s ages. They were all captured in “Second War of Jeong-yu”and sent to Japan. And the times they arrived in Japan were similar. However, NoIn absconded to Fujian, China at last and lived there for about 4 months until he returned to homeland in Dec. 1599. Kanghang was released in Apr. 1600 and returned to Korean dynasty by passing Tsushima Island. The difference is that one person left behind GeomKye Diary with the records of Fujian, China, and one person left behind Kanyang Note with the records of Japanese cultural relic, system and territory situations, etc. It could be learnt from these two documents that, the attitudes toward Buddhism of Korean scholars, Ming dynasty officials and Japanese officials are different. Ming dynasty officials held inclusive view of religion that Confucianism, Buddhism and Daoism could intermingle. NoIn and Korean officials held repulsive view of religion that Confucianism is overwhelming and the heresy should be attacked. Japan held the view of Confucianism and Buddhism’s intermingle. It is certainly that Buddhist Monks had high social position. The Buddhist situation of Korea contrasted sharply with Ming dynasty and Japan.
한국어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압송된 노인(魯認, 1566-1622)과 강항(姜沆, 1567-1618)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지역적으로 전라도 출신이란 점, 일본으로 압송되었다가 치욕을 참지 못하고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다는 점,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훗날 모두 무사히 귀국하였다는 점이 그러하다. 노인은 중국 복건성(福建省)으로 탈출하여 복건에서 약 4개월간 생활하다가 1599년 12월에 귀국하였고, 강항은 1600년 4월에 석방되어 대마도를 거쳐서 귀국하였다. 둘의 차이점도 있다. 강항은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일본에 남아 조선의 성리학을 전수해주었고, 일본의 문물제도 및 국토의 상황을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이란 기록을 남겼다. 반면 노인은 철저한 목적성과 세밀한 안배, 포기할 줄 모르는 신념, 그리고 복건성 관리의 도움으로 결국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금계일기(錦溪日記)』라는 조선 최초의 중국 민(閩) 지역에 대한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금계일기』와 『간양록』을 통해 16세기 조선과 명, 일본의 각기 다른 불교관 및 종교관을 파악할 수 있었다. 노인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독존유술(獨尊儒術)의 토대 위에 불교를 이단으로 공격하는 배척적인 종교관을 나타내고 있었다. 반면 명나라 관원들은 유불도 융합이라는 포용적인 종교관을 유지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도 유불의 융합적인 관점 및 일본사회 건설에 대한 승려들의 공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 승려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소중한 기록을 통해 16세기말 조선과 명,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의 종교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이후 이들 국가의 문화형성과 그 차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어
在丁酉再亂中有不少朝鮮人被俘,其中的代表人士就有魯認(1566-1622)和姜沆 (1567-1618)。姜沆與魯認相差一歲,兩人具有幾個共同特征:都是全羅道人,皆爲“丁 酉再亂”時被俘虜並送到日本;到日本後,都因無法忍受恥辱而他們都試圖潛逃過兩 次。後來他們都平安地回國:魯認潛逃到中國福建,在福建生活了大約四個月,至一五 九九年(萬曆二十七年)十二月歸國;一六零零年四月,姜沆被釋放,經過對馬島回到 朝鮮;不同的是,姜沆潛逃失敗了,就在日本傳授性理學,並留下了日本文物制度以 及國土情況方面的記錄——《看羊錄》,留下了一段珍貴的歷史;而魯認帶有徹底的目 的性,經過了周密的安排,具有不知放棄的堅定信念,並得到福建官員的幫助,最終 成功從日本逃離,留下了對中國福建的記錄——《錦溪日記》。通過16世紀末寫成的《錦溪 日記》、《看羊錄》,我們可以瞭解到當時朝鮮士人、明朝官員、日本官員對佛教的不同態 度,並由此認識到:魯認以及朝鮮官員持有獨尊儒術、攻乎異端的排斥性宗教觀,而明 朝官員持有儒、佛、道融合的包容性宗教觀,而日本保持有儒佛融合的觀點,且和尚的 社會地位很高。通過這些歷史記錄,了解到十六世紀末朝鮮與明朝、日本的佛教情況有著 鮮明的對比。
목차
一. 序論
二. 從被俘虜到日本的佛教經驗
(一)魯認的日本佛教經驗
(二)姜沆的日本佛教經驗
三. 魯認的福建佛教經驗
四. 結語
參考文獻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