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Thinking “Kagutsuchi no Arabi” ─ Great Fire of the Temmei period in Kyoto seen by Ueda Akinari ─
「가구쓰치노아라비」고 ─ 우에다 아키나리가 본 덴메이 교토 대화재 ─
초록
영어
“Kagutsuchi no Arabi” is a memory about Kyoto big fire occurred on 30th of January in 1788, by Ueda Akinari. He lived in Awaji no sho village then, countryside of Osaka. Akinari was in trip to Kyoto and staying at the place of Higashi no toin, uncle of Akinari’s friend Matsumura Goshun, after apricot blossoms viewing on that day of the big fire. He had heard people troubled outside and was aware of the big fire happened. It was an unheard-of disaster which destroyed 8/10 of the city, including gosyo and nijojo. Akinari’s friend Goshun was unfortunately one of who lost their houses and evacuated to other places like their friends’ places. Akinari had seen and heard things regarding with the disaster in the way back to Osaka next evening. His writing shows that nijojo was in danger, gosyo was also destroyed, Kyoto shoshidai and shinsenen were burnt out, and that an emperor and a retired sovereign emperor excaped at that night. Additionally many scenes he had seen like women taking hands of the old and children, patients in being removed packed in a blanket, expectant mothers slogging forward, people bickering each other, finding their children, and cursing at the disaster beyond their capability. Sentences of this article are very simple with the least adjectives and reveal a striking contrast from Ban Kokei “Kagutsuchi no Arabi” or Senshu rojin “Hanamomiji Miyakobanashi”, both of which are describing Kyoto big fire like a spectacle. As it were, Akinari’s writing may be an experimental try if sentences written in ancient Japanese style can be a form of reportage.
한국어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 1734-1809)의 「가구쓰치노아라비(迦具都遅能阿良毗)」는 덴메이(天明) 8년(1788) 1월 30일에 발생한 교토 대화재를 기록한 글이다. 당시 아키나리는 오사카 교외의 아와지노쇼(淡路庄)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유람하기 위해 상경하여 후시미(伏見)에서 매화를 본 후 친구인 마쓰무라 고슌(松村呉春, 1752-1811)의 사조 히가시노토인(四条東洞院) 집에 머물고 있었다. 30일 새벽에 「조모(焼亡, 불이야)」라며 사람들이 소란을 떠는 소리를 듣고 가모가와(鴨川)의 동측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음을 알게 된다. 최종적으로 고쇼(御所)나 이조성(二条城)을 비롯하여 시가지의 8할이 소실되었다는 미증유의 대화재였으며, 고슌의 집도 불에 타 쇼고인(聖護院) 근처에 있던 친구 기토(几董)의 집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저녁에 아키나리는 배를 타고 오사카에 돌아가고자 시가지를 가로질러 후시미로 향하고, 그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들, 구체적으로 교토 소사대(所司代)나 신천원(神泉苑)이 불에 탔다, 이조성이 위험하다, 고쇼도 불에 탔다는 등의 재난 정보, 천황과 상황이 어디론가 피난을 갔다는 등의 소문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아키나리 자신의 눈에 비친 아이를 앞뒤로 따르게 하며 노인의 손을 이끄는 여성, 이불채로 운반되는 환자, 억지로 걷고 있는 임산부,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사람, 말다툼을 하는 사람, 신불을 원망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문장의 수식을 억누르고 광경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르포르타주풍 화문(和文)으로서 같은 대화재를 기록한 반 고케이(伴蒿蹊) 『가구쓰치노아라비(かぐ土のあらび)』나 천추노인(千秋老人) 『하나모미지 미야코바나시(花紅葉都噺)』가 읽을거리로서 사건을 윤색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가구쓰치노아라비(迦具都遅能阿良毗)」는 화문이 르포르타주의 문체로서 가능한지를 시험한 아키나리의 실험이었던 것이다.
일본어
上田秋成(1734-1809)の「迦具都遅能阿良毗」は、天明8年(1788)1月30日に起こった 京都大火について記した文章である。当時秋成は大阪郊外の淡路庄村に住んでいた が、たまたま遊覧のために上京し、伏見で梅を見てから友人の松村呉春(1752-1811)の 四条東洞院の家に泊まっていた。30日の未明に「焼亡」(火事だ)と人々が騒ぐ声がし て、鴨川の東側から火事が起こったことを知る。最終的には、御所や二条城をはじめ、市街地の8割が焼けたという未曾有の大火で、呉春の家も焼けて、聖護院近くに いた、これも友人の几董の家に避難したりしている。夕方、秋成は淀舟で大阪へ戻ろ うと、市街地をつっきって伏見に行くが、そこまでの間に見聞したこと、具体的に言 えば、京都所司代や神泉苑が焼けた、二条城が危ない、御所も焼けたなどの罹災の 情報や、天皇や上皇がどこそこへ避難したなどの噂が記され、また秋成自身の目に映った、子を前後に負って年寄りの手を引く女、布団のまま担がれる病人、無理に歩かせられる妊婦、迷子を捜す人、小いさかいをする人、神仏を恨む人の姿が描かれ る。文飾を抑え、情景を正確に写していくようなルポルタージュ風の和文で、同じ大 火を記した伴蒿蹊『かぐ土のあらび』や、千秋老人『花紅葉都噺』が、読み物風にでき 事を潤色しているのとは対照的である。「迦具都遅能阿良毗」は、和文がルポルタージュの文体になり得るかどうか試みた、秋成の実験であった。
목차
Ⅰ. はじめに
Ⅱ. 「迦具都遅能阿良毗」の記述
Ⅲ. 秋成の「迦具都遅能阿良毗」と蒿蹊の『かぐ土のあらび』・千秋老人『花紅葉都噺』
Ⅳ. おわりに
参考文献
<要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