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Joseon was the country founded with the military coup named Wihwa-do Retreat(威化島回軍). Therefore, in order to prevent recurrence of event such as the military coup like Wihwa-do Retreat, the Joseon government established its military for normal-time command and war-time command. The commander could not lead the military unit drafted and training for the war-time and the commander separately appointed by the central government would lead the military unit. Accordingly, the war-time commander had to bring the military unit that it could not know to come to war. In the meantime, two years prior to break out of the Imjin Japanese Invasion(壬辰倭亂), the Jeollabuk-do(全羅北道) region of today had the Jung Yeo-lip(鄭汝立) incident to execute some 1,000 persons. Jung Yeo-lip forecasted a great crisis like the Imjin Japanese Invasion and organized Daedonggye(大同契) to train people with the military drills. However, Joseon prohibited establishing any private military other than the government military as the royal forces. Jung Yeo-lip was accused and executed of attempting to rebel against the kingship by raising his own military forces. Therefore, when the Imjin Japanese Invasion broke out, numerous civil forces fought in other regions, but the Jeollabuk-do region had almost non-existence of Uibyeong(義兵) activities. When the Imjin Japanese Invasion broke out, the governor of Jeolla-do(全羅道), Lee Gwang(李洸), had many people requested to send the troop but he did not move at all. Thereafter, only after receiving the Decree of the king for military draft, he brought the Jeolla-do forces to march toward Seoul. But, Lee Gwang retreated back after learning the news that Seoul had been fallen as he marched to the Gongju(公州) area. He had no approval from the king for marching beyond the Gongju region. Thereafter, Lee Gwang mobilized the military force after the king ordered to bring in the military and marched toward Seoul. Marching to Yongin(龍仁) with some 60,000 soldiers, Lee Gwang requested the order from the government as to the operation directive, but there was no prompt order from the government that he ultimately was defeated by small number of Japanese forces. Subsequently, Lee Gwang retreated from Yongin and returned to Jeonju(全州). Upon the news that the Japanese forces invading Jeolla-do, he mobilized entire Jeolla-do forces to defend against the infiltration of the Japanese forces. In the middle of June, the Japanese forces came into Jeolla-do and Lee Gwang assigned the governor of Gimje Jeong Dam(鄭湛), Najupangwan(羅州判官) Lee Bok-nam(李福男) and others to Wungchi(熊峙) and the governor of Dongbok(同福) Hwang Jin(黃進), the governor of Gwangju(光州) Kwon Yul(權慄) and others to Ichi(梨峙) to defend against the Japanese forces. Therefore, the local officers and government forces of Jeolla-do did their best to defend Jeolla-do. The self-regulation and sense of responsibility of local officers, closeness and love of locality of commanders and military units are considered as the factors to bringing the remarkable victories in Wungchi and Ichi battles.
한국어
조선은 위화도 회군이라는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성립한 나라이다.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위화도 회군과 같은 군사 쿠데타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평시체제와 전시체제로 구분하여, 평시체제의 지휘관은 전시에는 자신이 평소 선발하고 훈련한 군대를 통솔할 수 없고, 중앙에서 별도로 임명한 지휘관으로 하여금 그 군대를 통솔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시체제 지휘관은 전시에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군대를 데리고 전장에 나서게 되었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오늘날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 1천여 명의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은 임진왜란과 같은 큰 변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사람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조선은 국왕의 군대인 관병 이외에는 어떠한 사병을 양성할 수도 없었다. 정여립은 사병을 양성하여 역모를 꾀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죽었다. 이에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다른 지역에서는 수많은 의병이 봉기했지만,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의병의 활동이 미미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많은 사람들이 출동하자고 건의하였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 국왕의 징병령 교지를 받고서야 전라도 군사를 데리고 서울로 향하였다. 그런데 이광은 공주까지 갔다가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회군하였다. 공주 이상의 지역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국왕의 승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광은 국왕의 재기병 명령에 접하고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6만의 군대를 이끌고 용인까지 간 이광은 작전 방향에 대하여 계속 정부의 지휘를 요구하였지만, 정부의 지휘가 신속히 내려오지 않으면서 결국 소수의 일본군 병력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이광은 용인에서 후퇴하여 군졸을 이끌고 전주로 돌아왔는데, 일본군이 전라도로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라도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일본군의 침입을 막아내는 활약을 하였다. 6월 중순에 일본군이 전라도로 침입하려 하였는데 이광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등을 웅치에, 이후 동복현감 황진, 광주목사 권율 등을 이치에 배치하여 일본군의 침입에 막도록 하였다. 이에 전라도의 지방관과 관군들은 전라도를 방어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지방관의 자율성과 책임감, 지휘관과 군인간의 친밀감, 향토애 등이 바로 웅치, 이치 전투의 빛나는 승리를 가져온 요인으로 생각된다.
목차
Ⅱ. 조선전기 전시체제 운영과 방어 실태
Ⅲ. 정여립 사건의 영향과 호남 방어
Ⅳ. 웅치·이치 전투의 전개와 그 의미
Ⅴ. 맺음말
<국문초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