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Wnag An-Shi's New Policy was confronted with criticism from many corners. Almost all the intellectuals since Southern-Song were against Wang and his New Policy. Such an opinion persisted down to the end of the pre-modern period. One can say that the criticism against Wang had its root cause on the widespread antipathy against his policy and philosophy. Wang's policies and philosophy definitely distance themselves from those of the mainstream moralcracy of the Confucianism. Wang emphasized the role of the state power, and emphasized the institutionalization and legislation. Wang's view as such was indeed differed considerably from that of traditional Confucianists. One can find in his new policy many aspects similar to the view of Guan Zi. Some aspects of Legalism are also observed. These disparities in political philosophy were the root causes of the antipathy of Chinese intellectuals against Wang in the traditional period.
한국어
1073년(희녕 6)가 되며 북송의 정계는 급속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왕안석에 대한 반대파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으며, 왕안석 자신 재상직위로부터의 하야를 강하게 요구하였다. 왕안석의 파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073년 가을부터 1074년 봄까지 지속되었던 긴 가뭄이었다. 가뭄으로 조정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鄭俠이 가뭄에 시달리는 流民의 참상을 묘사한 그림을 한 장 상주하였다. 신종은 정협이 올린 그림과 상주문을 輔臣들에게 내보이고, 아울러 조정에 신법 각 조항의 실태를 면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인 1074년(희녕 7) 4월, 왕안석이 파직되어 知江寧府로 임명되었다. 왕안석에 대신하여 韓絳을 재상인 同平章事로 임명하였으며 呂惠卿이 부재상인 參知政事로 임명되었다. 여혜경에게 실로 왕안석은 평생의 은인이라 하여도 과함이 없을 정도였다. 왕안석의 신임과 발탁이 있었기에 주변의 수많은 견제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중용되어 요직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왕안석이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부재상인 참지정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왕안석이 실각한 후부터 그는 서서히 왕안석을 등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점차 자기 중심의 정치 세력을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여혜경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관료를 좌천시키는 한편 왕안석에 동조하는 사람이나 왕안석의 친인척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여혜경은 李士寧의 사건을 확대하여 왕안석을 뒤흔들고자 하였다. 왕안석이 재상직에서 물러나 知江寧府로 있을 때, 山東에서 李逢과 劉育이 變亂을 도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사녕 또한 이 모의에 가담하고 있었다. 여혜경 및 그 일파는 왕안석이 이사녕과 교왕하였던 사실을 들어, 왕안석에게도 여파가 미치게 하려 기도하였다. 재상으로 재직하던 韓絳 또한 여혜경과 불화가 지속되자 국면의 전환이 필요하다 판단하였다. 이 무렵 中書에서는 한강과 여혜경 사이의 의견 불일치로 많은 업무가 처리되지 못하고 계류되어 있었다. 한강은 은밀히 신종을 만나 왕안석을 다시 조정으로 부르자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왕안석은 1075년(희녕 8) 2월 재차 재상에 임용되었다. 다시 재상직을 수행하게 된 왕안석에게는 예전과 다른 장애물이 존재하였다. 바로 여혜경의 비협조와 견제였다. 재상이라 해도 정무를 결정하고 처리하기 위해서는 부재상 여혜경과의 협의와 절충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여혜경은 거의 매사에 왕안석과 대립하였다. 1075년 5월 蔡承禧가 여혜경의 동생인 여승경을 탄핵하였다. 여승경이 권한을 남용하여 관원의 직무에 혼선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채승희의 탄핵은 여혜경에게까지 파급되었다. 7월에 접어들자 여승경의 권한 남용 문제는 더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여혜경은 결국 조정을 떠나 陳州의 지주로 落職하였다. 이후 여혜경은 왕안석에 대해 거침없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박으로 말미암아 왕안석의 아들 왕방이 33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왕방이 세상을 떠난 후 왕안석은 깊은 시름에 잠겨 신종에게 재상의 사직과 낙향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신종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1076년 10월 왕안석은 마침내 재상직에서 물러나 금릉에 은거하였다.
목차
Ⅱ. 1070년대 초 北宋의 정계와 王安石
Ⅲ. 呂惠卿의 王安石 공격
Ⅳ. 王安石의 정계 은퇴
Ⅴ. 맺음말
<국문초록>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