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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조선을 어떻게 이해하고자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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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did Yanagi Muneyoshi try to understand Korea?

고지마 야스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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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view towards Yanagi Muneyoshi is often polarized in Korea. While some praise him as “a Japanese who loved Korea,” others disdain him as an advocate of colonial identity. In any case, evaluation is often strongly influenced by contemporary historical context. Namely, Yanagi was widely praised because of his deep understanding of Korean art up until the 1960s, but with the rise of Korean democracy movement from the late 1960s to 1970s, Yanagi came to be criticized with heightened current of racial culture and ethnism in the background. In Japan, through the 1960s and 1970s, Yanagi was highly assessed because of his humanistic attitude, and from the late 1980s, his achievements began to draw wider attention from different fields of study: arts and crafts, religious studies, history of ideas, and Korean studies. Literature concerned with Yanagi kept growing in numbers through the 1990s and 2000s, and with the mingei (folk art) boom, he came to be dubbed as “the father of mingei.” However, simultaneously, he was heavily attacked by numerous studies, especially those concerned with orientalism and gender theories, which shed light on his problematic subconscious. Bearing such Japanese and Korean contexts of evaluation towards Yanagi in mind, this paper aims to discuss the characteristics of the ways in which he tried to understand Korea- a “philanthropic understanding” –and suggest an epistemological commonality between Yanagi and several other figures, such as Nishida Kitarō, Kurata Hyakuzō, and Yuasa Hachirō.

한국어

한국에서의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평가는 나뉜다. 야나기를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고,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방조한 자로서 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평가하는 것은 평가 시점에서의 역사적 상황에 강하게 규정된다. 즉 1960년까지는 야나기의 조선 예술에 대한 이해에 깊이 공감하고 그를 칭찬하는 논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한국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고 이에 연동 하여 민중을 기반으로 한 민족 문화와 민족주의의 부흥 운동이 배경이 되어 야나기 비판의 논조가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1960년, 70년대부터 야나기의 휴머니즘을 높이 평가하는 연구가 추진되고, 80년대 후반이 되면 야나기는 더욱 공예의 역사, 종교학, 사상사, 조선연구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90년대, 2000년대에 야나기 연구는 한층 무게를 더해 갔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민속 붐의 고조를 배경으로 야나기는 ‘민속의 아버지’로 널리 민속 애호가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이 시기에는 오리엔탈리즘론, 젠더론의 관점에서 야나기의 의식을 문제삼아 야나기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나오기 시작해 이윽고 ‘비판의 대합창’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이 야나기를 향한 한일의 다양한 논점을 역사적으로 정리 한 후, 야나기가 조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때, 그 이해의 본연의 자세 -‘애정에 기초한 이해’-를 고찰하고 그것이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구라다 하쿠조(倉田百三), 유아사 하치로(湯浅八郎) 등의 인식론과 통저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일본어

韓国での柳宗悦に対する評価は分かれる。柳を「朝鮮を愛した日本人」として肯定的に評価する人々もいれば、植民地イデオロギーを幇助した者として糾弾する人々もいる。しかし、評価というものは評価する時点での歴史的状況に強く規定されてくる。すなわち、1960年までは柳の朝鮮芸術への理解に深く共感して、柳を称賛する論説が主流をなしていたが、60年代後半から70年代になると韓国民主化運動が高揚し、それに連動した民衆を基盤とした民族文化と民族主義の再興の動きが背景となって、柳批判の論調が高まってくる。日本では、1960年、70年代から柳のヒューマニズムを高く評価する研究が推し進められ、80年代後半になると柳は更に美術工芸史、宗教学、思想史、朝鮮研究等々多様な専門分野で取り上げられるようになり、90年代、2000年代には柳研究は一層の厚みを増していった。またこの時期には、民芸ブームの高まりを背景に柳は「民芸の父」として広く民芸愛好家から支持されていった。と、同時にこの時期にはオリエンタリズム論、ジェンダー論の観点から柳の意識下にある問題性を炙り出した柳批判が像の解体を強く意図した批判的研究が出始め、やがて「批判の大合唱」を呈するにいたる。 本稿ではこのように柳に向けられた日韓の様々の論点を歴史的に整理した上で、柳が朝鮮を理解しようとした際の、その理解の在り方−「情愛に基く理解」−を考察し、それが西田幾多郎、倉田百三、湯浅八郎等の認識論と通底するものであったことを明らかにする。

목차

<요지>
 Ⅰ. 머리말
 Ⅱ.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
 Ⅲ. 한국의 야나기 무네요시 비판
 Ⅳ. 오리엔탈리즘과 야나기 무네요시
 Ⅴ. 사랑은 이해이다
 Ⅵ. 맺음말
 <참고문헌>
 要旨
 Abstract

저자정보

  • 고지마 야스노리 Yasunori, Kojima.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특임교수. 역사학 전공.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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