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Activity of Fairy tale storytelling writer who represents Japan (Sazanami Iwaya and Takehiko Kurushima) was considered in concerning with Chosun by this paper. And the movement of the Japanese Settlers in Chosun under Japanese Rule who underwent influence of Takehiko Kurushima was considered. The Japanese Settlers in Chosun Fairy tale storytelling writer came into action through the Gyeongseongilbo mainly. And That concerned connections of Kurushima (Otogi-club and Kaijikai). The Maeil-sinbo and the Gyeongseong-ilbo made the children’s committee start from the end of 1921, and even made them expand to a Chosun child, and tried to make a Fairy tale spread. It was embodied through the Chosun Fairy tale spread Group in 1923 actually. Yashima of Shimonoseki Otogi-club, Sada of Kaijikai participated with the children’s committee and the Chosun Fairy tale spread Group. Yashima took the lead in the children’s committee and Sada took the lead in the Chosun Fairy tale spread Group. Sada led a Chosun child society from the end of 1925 to 1931 continuously. Sada asked a member of Kurushima and Kaijikai to Chosun and held a Fairy tale storytelling meeting. A library clerk put emphasis on field talk in the area of England and America, and it developed by the system which does small-scale storytelling. But an art of conversation like an oratory and a gesture are emphasized at a big place in Japan, and, it's popula. Kurushima is the spread person of a Fairy tale storytelling in Japan. Kurushima utilized Japanese tradition and nationalism and made a Fairy tale storytelling spread, targeting the training of spirit and the character. Sada had the interest in child's kind movement and established various child groups. Sada organized the Chosun Fairy tale spread Group (1923), child love union of Japan and the Chosun (1924) and Chosun child society (1925) etc. But Sada had the interest in Japanese child and was aiming at goodwill of Japan and Chosun. Japanese Fairy tale storytelling requested the high Japanese ability of a Chosun child compared with the Japanese Fairy tale collection for reading. The percentage of school attendance in the colony Chosun and the expert rate of Japanese were low in 1920's. Chosun child couldn't understand Japanese Fairy tale storytelling with that. For example, Takeru Koike understood such situation and proposed Fairy tale storytelling from which an imitative word was omitted. But this couldn't be also an alternative. Language problem in a colony has caused a serious crack.
한국어
본고에서는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구연동화가 이와야 사자나미와 구루시마 다케히코의 활동을 조선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개략하고, 그 영향을 받은 재조일본인의 움직임을 고찰하였다. 재조일본인 구연동화가는 경성일보를 통해 활동했는데, 구루시마의 인맥(오토기구락부와 회자회)이 활용되었다. 1918년에 다쓰야마 루이코는 재조일본인 소학교를 중심으로 오토기 강연회를 실시했지만 단기간의 활동에 그쳤다. 매일신보 및 경성일보는 1921년 말부터 소아회를 발족시켜 그 대상을 조선아동으로까지 확대시켜 구연동화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고, 1923년 조선동화보급회를 통해 구체화 된다. 소아회와 조선동화보급회는 시모노세키 오토기구락부의 야시마 류도와 회자회(回字會)의 사다 시코가 동시에 참여했는데, 야시마는 전자를, 사다는 후자를 주도했다. 사다는 계속해서 1925년 말부터 1931년까지 조선아동협회를 이끌며 스승 구루시마를 비롯해 회자회 회원을 다수 조선에 초청해 구연 순례회를 개최했다. 영미권(英美圈)에서는 도서관원이 원화(原話)에 중점을 두고 소규모로 스토리텔링하는 방식으로 발달․보급된데 반해, 일본에서는 구연동화가, 교육자, 종교 관계자가 큰 장소에서 웅변술과 같은 화술과 제스처를 중시하고, 대중적 성격을 지니고 독특한 발전을 이루었다. 구연동화의 보급자 구루시마는 근세적 일본 전통과 개인적 전쟁체험(청일전쟁, 러일전쟁 참전), 군인, 기독교 신자, 당대 내셔널리즘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정신 및 인격 수양을 목표로 구연동화를 보급하였다. 사다는 아동애호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1923년 조선동화보급회, 경성소년의용단, 1924년 내선(內鮮)아동애호연맹, 1925년 경성소년단, 조선아동연맹(조선아동협회로 개칭) 등 여러 단체명을 수시로 바꾸면서 아동애호를 위한 교화활동, 잡지 발행, 강연회, 모성존중, 모체보호사업 장려, 일본에서의 조선 소개 구연활동 등을 전개했다. 1928년 당시 사다의 구연활동은 대중구연동화, 교실동화, 종교동화를 전부 포괄하며 조선아동협회 주간, 경성사범학교 내 순광(醇光)동화연구회 고문, 종교동화일본연맹 간사 등을 역임하며 전방향적으로 활동했지만, 그 주요 활동의 대상과 목적은 일본아동과 ‘내선융화’에 있었다. 읽기용 일본어 조선동화집에 비해, 일본어 구연동화는 조선아동에게 더 높은 일본어 능력을 요구했다. 일본어 구연동화의 활용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취학률과 일본어 식자율의 저조로 인해 조선아동으로까지 대상을 확장하는 데 한계로 작용하였다. 이를 민감하게 인식한 고이케 다케루는 의태어 등을 생략한 구연을 제안했지만, 이 또한 대안이 될 수는 없었고 식민지 언어 문제는 심각한 균열을 야기했다. 본고는 일본어를 중심으로 다루었지만, 조선어와 일본어를 통한 읽고 쓰기용 조선동화집, 듣기용 구연동화, 말하기용 구연동화집의 수용과 확산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 검토는 앞으로의 과제다.
목차
1. 서론
2. 근대 일본의 구연동화 전개
3. 경성일보와 구연동화의 활용
4. 사다 시코(佐田至弘)와 구연동화의 전개
5. 결론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