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妓生と芸者のアイデンティティの比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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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mparison of identity of Gisaengs and Geisha

金美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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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identities of Gisaengs and geisha. It compares viewpoints of Gisaengs in Korean society with geisha in Japanese society and contemplates of their life; they were not free from social attention. Gisaengs in Joseon Dynasty were the official disciplines in charge of the national feasts and performances. While they were the lowest class under the management of the rigid status system. Gisaengs had no choice but to offer sexual amusements for men despite Korean Confucian society attached great importance to one’s chastity and integrity. Men considered gisaengs as the snoots but wanted to leave gisaengs beside them. On the other hand, the women bewared against the gisaengs and were jealous them. Officially, gisaengs who were impossible to get married and have a child had a destiny to be a mistress or the retireds without marriage forever. When the gisaengs got older, they lost their popularity and retired. The retireds’lives were tough economically. They hope to be a mistress since they could not take salaries even though they were official disciplines Gisaengs became in the citizen classes belonging to the Gweon-beon (a gisaeng call-office) by statutes and institution of Japan. It was a different social class from Gisaengs in Joseon Dynasty. People look down upon Gisaengs constantly. The society also was cruel. In the case of geisha, monetary relations were formed with them. It was an employment contracts; young girl was sold by their parents in childhood as a stepdaughter of Okiya. Geisha was able to get married but have a patron because of inescapable system from Okiya if they were under all the loans unpaid back. They were able to work after marriage and showed respect to wives of their patron. The patron’s wives deemed the geisha as a career woman to contribute social and business success. Japanese women were not jealous about the relations between the wives and geishas and considered that they have a different role for each Japan believed they should hold the image of geisha formed by traditional society. Therefore, it was possible to keep and take their traditions over although modern geisha led the entertainmentthrough the influence of western culture. According to the documents such as 『So-hu-rok』 a book written the life of gisaeng 『Jang-han』 magazine published by gisaengs, Gisaengs expressing a voice and passion themselves positively have a different character against the geishas.

한국어

본 연구의 목적은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기생과 게이샤의 삶을 통해 한국사회가 기생을 보는 시각과 일본사회가 게이샤를 보는 시각을 고찰하고, 비교하여 그녀들의 아이덴티티를 밝히는 것이다. 조선시대 기생은 신분사회에 엄격한 관리의 대상이었던 천민이면서 궁중의 행사와 연희를 담당했던 관기였다. 정조와 절개를 중시했던 유교사회이지만 양반 남성들을 위해 암묵적으로 성적유희를 제공할 수 밖에 없었다. 남성들은 기생을 멸시하면서도 곁에 두고 싶어했으며, 여성들은 멸시하면서도 질투의 대상으로서 경계했다. 공식적으로 결혼과 출산이 불가능했던 기생은 애첩이 되거나, 평생 결혼하지 않고 퇴기로 인생을 마감해야 할 운명이었다. 나이가 들어 인기가 없는 퇴기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했다. 관기 이지만 봉급을 거의 받지 못했던 기생들은 애첩이 되는 것을 바라였다. 일본식민지시대 기생들은 일본의 법령과 제도에 의해 조선시대의 기생과는 다른 성격의 민간인의 신분으로 권번에 소속되었다.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모던기생으로서 활발한 예능활동을 하게 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사회적인 시선은 변함없이 멸시했고, 차가웠다. 일본의 게이샤는 에도시대 유행하던 유녀가부키를 유곽에 도입하면서 샤미센 연주자가 필요하여 등장하게 된다. 게이샤는 유곽 연희의 보조역할을 담당했던 전문예인이었다. 기생과 달리 게이샤는 일반인의 신분으로 자유의지로 게이샤가 되었기 때문에 강제성은 전혀 없었다. 메이지 시대가 되어 하나마치(花街)의 형성으로 오키야, 오차야, 요리점, 권번 등과 같은 삼업조합이 형성되고, 뇨코바에서 교육받고, 가부렌조에서 공연하며 게이샤로서의 자리매김을 해나갔다. 메이지 시대에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오키야의 주인에게 양녀를 들이는 형태로 고용계약으로 맺어진 금전관계가 형성됐다. 빚을 갚기 전에는 오키야를 나올 수 없는 시스템이므로 게이샤는 패트런은 있지만 결혼은 할 수 없었다. 일본사회는 게이샤가 메이지 시대에 잠시 양녀로 들이는 형태의 고용계약으로 맺어진 금전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있지만, 일본사회가 게이샤를 보는 인식과 시각은 전문예인이었으며, 전문직업여성이었다. 게이샤는 손님의 아내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아내들은 게이샤와 남편과의 관계를 사업과 사회적 성공에 기여하는 직업여성으로 간주했다. 일본 여성들은 아내와 게이샤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각자의 역할이 다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질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사회는 게이샤를 전통사회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모던 게이샤가 활발하게 예능활동을 했을 때도 게이샤들은 전통을 지킬 수 있었으며 전통문화를 지키는 게이샤로 오늘날까지 이어 온 것이다. 게이샤에 비해 기생은 『소수록』과 『장한』과 같은 자료들과 같이 스스로의 목소리와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본어

本研究の目的は、社会的視線から自由ではなかった妓生と芸者の暮らしを通して韓国社会が妓生を見る視角と、日本社会が芸者を見る視角考察し、比較して彼女たち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明らかにすることである。 朝鮮時代の妓生はな身分制社会において厳格な管理の対象であった賎民であり、宮中の様々な行事や宴会を担当していた官妓であった。儒教社会ではあるが、両班男性たちのため、暗黙的に性的遊戯を提供させられて肉体的な搾取を受けた。男たちは妓生を蔑視しながらも、身近に置こうとし、女性たちは見下しながらも嫉妬の対象として警戒した。正式の結婚と出産ができなかった妓生は愛妾になるか、一生一度の結婚なく退妓になるかだった。歳をとって人気がなくなった退妓たちは経済的に厳しい生活を送った。官妓であっても俸給が殆どなかった妓生たちは愛妾になることが願いであった。 日本植民地化の妓生たちは日本の法令と制度によって朝鮮時代とは異なる性格の身分で、券番に所属し、西洋文化の影響でモダン妓生として活発な芸能活動をした。しかし、時代が変わっても社会的な視線は変わらず、冷たくて厳しかった。 日本の芸者は、江戸時代に流行した遊女歌舞伎を遊郭に導入し、舞台に上げる際、三味線の演奏者が必要となって登場した。遊郭の宴会の補助の役割を担当する専門芸人であった。妓生と異なって芸者は町人の身分で自由意志で芸者になったため、強制性がなかった。明治時代になって花街が出来てから置屋、料理屋、見番などの三業組合が形成され、女工場で教育を受け、歌舞練場で公演をしながら芸者としての位置付けしていく。 明治時代に年季奉公の雇用契約をして幼い女の子の身売りで置屋に入った芸者は金銭関係で結ばれていた。借金の返済が済まないと自由の身にならなかった芸者はパトロンは持っても結婚はできなかった。結婚をすると芸者の仕事はそれ以上できなかったからであった。 日本社会は芸者が明治時代に養女にする形態をとって雇用契約に結ばれた事実はあるが、日本社会が芸者を見る認識は視線は専門芸人であり、専門職業女性である。芸者たちは客の妻たちに尊敬を表す。妻たちは芸者たちを夫との関係をビジネスと社会的成功に寄与する職業女性として見なす。日本女性たちが妻と芸者との関係についてお互いを女性の仕事を分担して相互補完的存在と考えてので、嫉妬しないのである。 そして、日本社会は芸者を伝統社会で形成されたものというイメージを徹底的に守っ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存在と考えており、西洋文化の影響でモダン芸者も活発に芸能活動していたが、彼女たちは 先駆者や革新者ではなく、伝統の守護者になった。伝統文化の芸者は今日に至るのである。

목차

<요지>
 Ⅰ. はじめに
 Ⅱ. 妓生のアイデンティティ
  1.朝鮮王朝時代の妓生
  2.日本植民地時代の妓生
 Ⅲ. 芸者のアイデンティティ
  1. 江戸~明治時代の芸者
  2. 大正~昭和時代の芸者 
 Ⅳ. 結論
 <참고문헌>
 要旨
 Abstract

저자정보

  • 金美英 김미영. 東北大学大学院 アジア文化論専攻.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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