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오늘날의 일본다도는 사색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중요시하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취미활동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도의 양식을 확립되어 가던 16세기 후반에 정권을 장악한 무장(武將)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이하 히데요시)는 다도를 사적인 취미활동의 영역이 아니라, 부하를 장악하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이벤트로써 활용하였다. 우리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긴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는 다인(茶人)을 측근으로 두고 다도(茶道)를 즐기는 한편, 일종의 새로운 방식의 다도 이벤트를 개최하는 한편, 무력에 의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부하 무장들에게 명품 다도구(茶道具)를 하사하여 환심을 사기도 하고, 천황을 모시고 다회를 개최함으로써 다도를 새로운 양식의 의례(儀禮)로 삼아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평상시는 물론 전투 중에도 진지에서 다회를 열었는데, 특히 임진왜란 중에 규슈의 나고야(名護屋)에 진영을 설치하여 전투를 지휘하는 기간에, 여러 차례 다회를 즐기며 전쟁을 독려했던 사실은 다도가 평화와 전쟁에 두루 동원된다는 다도의 양면적 성격을 극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본고는 히데요시가 개최한 각종 다도 행사 즉, 대중을 동원한 대규모 다회, 천황과 공경을 모신 궁중의 다회, 전투중의 진지에서 연 다회 등을 정리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히데요시의 다도는 당대의 절대 권력가가 주도한 다도라는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후 일본다도의 방향과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이벤트였다고 생각한다. 히데요시는 당대의 최고 다인인 센리큐(千利休 1522-1591)를 측근에 두고 각종 이벤트를 기획하도록 하였다. 창작능력과 기획능력이 탁월한 센리큐는 각종 다도 이벤트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본고에서는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일본어
16世紀末戦国時代の終り頃、茶道はすでに京都を中心にする武家社会に広く根付いていて、個人の趣味活動であると同時に武士の教養として評価された。武士は茶道具を収集し、茶道行事に参加することで、武功だけではなく文化面にも識見をもつことを誇示しようとした。生死が行き違う戦地で緊張した時間を過ごさなければならない武士にとって茶道は心を浄化させる時間と空間を提供してくれる特別な文化世界と認識された。秀吉は40歳頃から茶道を趣味にした。1585年、京都の大徳寺で大規模な茶会を開き天皇を主賓に招待することで権威を誇った。1585年、1586年には宮廷で天皇一家のための茶会を開催し、1587年には北野神社の境内で大規模の茶会を開催して、自分は茶道の愛好家であることを広く知らせた。秀吉は病気で死ぬ直前まで度々盛大な茶会を開き、茶道に対する強い愛着を現わした。秀吉は私的には茶道に凝って茶道具を収集し、側近を招いて茶会を楽しんだ。このような趣味は公的な場にも拡がって政治の手段にして茶道具の献上させるとか、集めた茶道具の下賜、すなわち茶道具の贈答を通じて部下の忠誠を誓約させて信頼を確保する手段にした。また、茶道を政治イベントとして企画・進行して、新しい政治行事としての展示效果をもはかった。秀吉は強い経済力を駆使して黄金で組み立て式の茶室を作って宮廷をはじめ各地に持ち込んで茶会を開いた。宮廷で天皇のために茶会を開催するという名分は事実上、自分の位相を誇示するためのことであり、これを行うための経済力と茶人を掌握していたことを誇示しようとした。以上の論をまとめると、秀吉は個人的な趣味として茶道を楽しむ一方、公的には政治の手段にするために茶道具の収集と下賜、自分の力量を誇示するためのイベントをもっての茶会を開催して茶道の文化的特質を最大限活用したと言える。
목차
2. 히데요시 다도의 시대적 배경
3. 다도의 취미와 다도구의 활용
4. 권력의 과시를 위한 이벤트로써의 다회
5. 결론
<参考文献>
要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