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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최경회 장군의 생애와 의부인(義夫人) 주논개에 관한 소고(小考)

원문정보

Life of General Choi Gyong-Hoi, a Patriotic Soldier, and Joo Nongae, a Patriotic Lady

오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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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In the late 18th century when the Imjinweran, a Japanese invasion, occurred, the Joseon government was immersed in chaos because of party disputes, but Japan, a neighboring country, was faithful to reinforce its own national power by adopting western ideas and based on the power acquired. It was desperately enthusiastic to advance onto the continent. About 20 days after Japan made a landing at Busan Port in 1592, Hansung, a capital area of Joseon, was occupied by the Japanese army. This shows how our government army was enervated. In battles to protect the country, patriotic soldiers which were organized by the people themselves were considered important leaders instead of the government army or the patriotic soldiers in Honam, which was an important grain belt. Choi Gyong-Hoi, who came from Hawsun, Jeollanamdo and stayed in his hometown after he resigned himself from being a government officer, mobilized patriotic soldiers when the crisis occurred in his area and led them to stop the Japanese army which attempted to advance into Jeollanamdo to gain power over the peninsula. As a preliminary project to get revenge for the defeat at the first Jinjoo Fortress Battle and to occupy Jeollanamdo, a grain belt, the Japanese army attacked Jinjoo Fortress again and Choi Gyong-Hoi advanced into Jinoo with patriotic soldiers. At that time, when staff officers suggested to concentrate on the defense of Jeollanamdo rather than advance into the Gyongsangdo area, Choi Gyong-Hoi joined in the Jinjoo Fortress Battle saying that as both Jeollanamdo and Gyongsangdo are our country, we do not have to differentiate between them. As 10,000 Joseon soldiers fought against the Japanese army made up of more than 100,000 soldiers, the fortress was ultimately overthrown and Choi Gyong- Hoi showed politeness to the north where the king stayed and threw himself into the Namgang River and died. After he died for his country, Joo Nongae who joined in the Jinjoo Fortress Battle as his concubine participated in the party to celebrate the Japanese victory in the battle and threw herself, while clutching a Japanese general, into the Namgang River. This was a typical example that shows there is no differentiation in gender for patriotism.

한국어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 후반 조선조(朝鮮朝)는 사색당파(四色黨派)에 휩싸여 국정 (國政)이 혼란에 빠져있었던 데 반해, 인접국가 일본(日本)은 서양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여 국력을 충실히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륙에 진출할 야망에 불탔다. 1592년 일본이 부산포에 상륙한지 채 20일이 되지 않아 수도인 한성(漢城)이 점령당했 던 데에서 당시 조선의 정규군인 관군(官軍)이 얼마나 무기력 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는 관군 대신 국민 스스로 조직한 의병(義 兵)의 역할이 중요시될 수밖에 없었고, 그 중심에는 주요 곡창지대였던 호남(湖南)지역의 의병들이 있었다. 전라도(全羅道) 화순(和順) 출신으로 담양부사(潭陽府使)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에 머무르고 있던 최경회(崔慶會)는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분연히 의병을 조직하여 장수(長水)로 진군하여 전라도지역으로 진출하려한 일본군을 막는데 앞장섰다. 일본군이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설욕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 한 사전 정비작업으로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여 ‘제2차 진주성전투’가 시작되자 최경회는 의 병을 이끌고 진주지역으로 진격 하였다. 이때 참모들이 경상도지역으로 진군하기 보다는 전라도지방 방어에 치중하는 것을 제의하 자 최경회는 “전라도도 우리 땅이요, 경상도도 우리 땅인데, 어찌 지역을 가린단 말인가”며 진주성 전투에 합류하였다. 10만을 넘는 일본군에 1만 명의 병력으로 맞서다가 결국 성(城)이 함락 당하자, 최경회 는 국왕이 있는 북쪽을 향해 예(禮)를 표하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삶을 마감하였다. 최경회가 순국한 후 그의 측실로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고 있던 주논개(朱論介) 역시 기생으로 신분을 속이고 일본군의 축하연에 참석하여 일본군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함으 로써 부부가 함께 순국하였다. 애국(愛國)에 남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전형적 사례이다.

목차

논문요약
 Ⅰ. 머리말
 Ⅱ. 생장과 관직생활
 Ⅲ. 기병과 전투참가
 Ⅳ. 제2차 진주성전투와 순국
 Ⅴ. 의부인 논개의 순국
 Ⅵ. 맺는말
 참고문헌
 

저자정보

  • 오수열 Oh, Soo-Yol.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ㆍ한국동북아학회 회장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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