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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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에는 화랑과 數百·數千의 무리가 山水勝地에서 노래와 춤으로 놀았고, 신라의 조정은 이 놀이라는 방법에 의해 인재를 선발하고 등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이 놀이가 어떤 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실체가 무엇인가를 밝히고 싶다. 화랑에 대한 종래의 연구 중에 가장 대표적인 논문은 池內宏의 「新羅人の武 士的精神」(『史學雜誌』제40편 8호, 1929년)과 「新羅の花郞について」(『東洋 學報』제24권 1호, 1936년), 鮎貝房之進의 「花郞攷」(『雜攷』제4집, 1932년), 그리고 三品彰英의 「新羅の奇俗, 花郞制度について」(『歷史と地理』25권 1·2· 4·6호, 26권 1·3·5·6호, 1930~1931)과 「新羅花郞の源流とその發展」 (『史學雜誌』제45편 10~12호,1934년) 등이 있다. 그 후 많은 연구논문이 발표되었지만 결과적으로 池內·鮎貝·三品 등의 1930년대 견해의 범위를 벗어나는새로운 비판은 거의 볼 수 없었다. 池內 氏는 화랑제도가 신라에 기여한 무사적 역할, 그리고 鮎貝 氏와 三品 氏는 민속학적인 입장에서 화랑제도를 논하였지만필자는 여기에서 놀이가 의미하는 특수한 고대적 개념과, 그리고 그것이 삼국시대의 치열한 군사투쟁 나아가서 韓半島統一이라는 큰 역사의 움직임 속에서 어떠한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다루어 보고 싶다. 『朝鮮學報』제82집 昭和 52년(1977년) 1월
목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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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5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