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not only to examine I Kawŏn’ Northern Learning (Pukhak, 北學) but also to evaluate Pak Chi-won’s works related with his experience in envoy to Qing (Yŏnhaeng 燕行) an official trip that made Pak Chi-won to emphasize Northern Learning. The experience in Qing le Pak to transform his thought and it was represented in his nomenclature of architectures and farming tools, e. g. Hap’ungchukno dang 荷風竹露堂, Paekch’ŏkodong kak 百尺梧桐閣, Kongjak guan 孔雀館 for architectures, and yangsŏn 颺扇, gikki 織機, and yongkol 龍骨 for farming tools. His experience of Anyi county magistrate (Anyi hyŏn’gam 安義縣監) is significant in that most of his activities were deeply rooted in Northern Learning comparing with his other government services, such as Yŏnch’ŏn magistrate (Yŏnch’ŏn kunsu 沔川郡守) and Yangyang governor (Yangyang busu 襄陽副守). During his government service in Anyi, Pak Chi-won devoted his times and efforts to horning his practical writings skills, thus trying to escape from his ordinary, wild literary style-so-called “Yonam’s literary style (yonamch’e 燕巖體).” Diary of Yorha (Yŏrha ilgi 熱河日記), a representative work of Pak‘s, were full of yonamch’e and other intellectuals, I Dŏkmu and Yu Tŭkgong, paid their attention to the unique literary style. King of Chŏng was also interested in yonamch’e. He, however, criticized Pak’s literary style, pushing him to write in different way; in other words, he commanded Pak to write an official document with simple structures and traditional word usages. King of Chŏng’s condemnation on literary style was related with his political purpose to keep a balance between power of Southerners (Namin 南人) and power of Westerners (Sŏin 西人). For this reason, Pak Chi-won pored over epistolary literature (sŏganmun 書簡文) or model essays for official document and to reform his literary style; given the fact that his former literary work, Diary of Yorha, ofen cited the lines of Zhuangzi 莊子 and employed modern chines style (paekhuach’e 白話體), this change generated a big difference. The change of his literary style was reflected on Yŏnsangkak sŏnbon 煙湘閣選本 and Kongjakguan mungo 孔雀館文稿 which were released during his periods of Yŏnan county magistrate. His writings in that periods, illuminates his diverse activities; he wrote relatively many essays in Yŏnan compared to other government service periods. Specifically, most of his activities were related with Silhak 實學. The most conspicuous record of Pak is that he acquired the surplus grains stored in Anyi county and sent them to Ministry of Taxation (Hojo 戶曹), thus helping to utilize the redundant grain for Hyegyŏnggung Hong Ssi. To sum up, his activities as Yŏnan county magistrate provide meaningful, various evidences to grasp his writings in Yŏnan county; given the fact that he wrote more writings- not with formal, pragmatic style but with wild, unconstrained style, in Yŏnan county than in other places, his periods of Yŏnan county magistrate is important. In this respects, this paper gives better understanding not only on the change of his writings but also the transformation of his thoughts.
한국어
본고는 연민 선생의 북학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고, 나아가 연암 박지원의 安義 현감 시절에 주목하여 그의 치적과 작품 활동을 북학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연암이 북경과 열하를 다녀오고 나서 강조한 북학 사상은 안의 현감으로 와서 구체적인 건축물이나 樓臺의 명칭, 농기구 같은 것에서 나타난다. 하풍죽로당과 백척오동각, 공작관 같은 건축물이나 연상각 같은 현판의 당호로 표현된 것이 있었고, 颺扇과 織機, 龍骨, 龍眉, 水轉, 輪碾 같은 농기구도 있었다. 북학과 관련된 행동은 안의현감 시절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박지원이 면천군수와 양양부사로 있으면서 보여준 행적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이 시기 연암은 『열하일기』 같이 자유분방한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나 공문서 같은 실용문에 치력하던 때이기도 하다. 정조는 연암의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덕무와 박제가 등이 지은 『武藝圖譜通志』와 이덕무가 지은 『御倭諸論』을 보고 연암의 문체와 같다고 지적하였다. 이어 정조는 남공철을 통해 연암에게 순정한 글을 바치라는 명령을 한다. 정조의 지적에는 천주교에 빠져있던 남인들이 벽파의 공격을 받게 되자 정조는 남인들이 천주교에 빠진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노론의 문체를 지적하여 당파의 균형을 취하려고 했다는 정치적인 배경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현감으로 있던 연암은 그동안 『열하일기』 같은 편에서 『장자』를 인용하거나 백화체를 사용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점자 주자의 서간문이나 陸宣公의 奏議 같은 글을 탐독하여 문체도 일신하게 된다. 정조가 연암의 문체를 문제 삼고 난 후 연암은 그동안 지은 자신의 저술을 정리하여 「연상각선본」과 「공작관문고」라는 책의 卷으로 정리하여 국왕에게 받치려고 했다. 결국 이 편명은 훗날 『연암집』이 편찬될 때 1권, 2권, 3권이 된다. 안의현감 시절 단편의 글은 40여 편에 이르고 면천군수 시절에는 10여 편에 이른다. 그리고 1년도 채 못 되는 양양부사 이후의 시절에는 겨우 몇 편에 그쳤으니 사실상 작품생활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안의현감시절의 글 중에는 감사의 부름을 받고 獄事에 관하여 전말을 기록한 글이 있으며, 안의현의 현안 문제를 다룬 글로 함양군수와 주변인들에게 준 편지가 있다. 그리고 안의현 관사의 주변을 정돈하고 각종 건축물의 記文을 남기고 있다. 아전들이 받드는 郭侯에 대한 記文도 남기고 있어 안의현감 시절 연암 저술 활동을 살필 수 있다.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있으면서 남긴 행적은 실학의 실천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함양에 홍수의 피해가 발생하자 안의현감으로서 사람을 동원하여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한 과정, 공덕비를 마다하는 청렴, 해학이 있는 좋아는 매력 같은 것을 살펴보았다. 특히 안의현에 보관되었던 저치곡 9,000석을 확보하고 호조에 보내어 심이지가 혜경궁 홍씨를 위한 잔치에 사용할 수 있게 도운 것은 연암의 중요한 행적 중의 하나이다. 안의현감시절 연암을 살펴본다는 것은 그의 전체 작품생활을 이해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가 『열하일기』와 같이 호방하고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에서 실용문 위주의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안의현감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정조는 연암의 문체를 거론하였고, 함양군수 윤광석은 연암이 오랑케 풍속을 따라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연암은 안의현감을 거치면서 내외적으로 자신이 구현하려고 한 북학사상이 현실적인 난관에 봉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정조에게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친 것은 안의현감 시절부터 시작하여 면천 군수 시절에 와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면천 군수 시절 「課農小抄」, 「서이방익사」, 「沔陽雜錄」 같은 편이 완성되었지만, 이중 「과농소초」와 「면양잡록」은 이미 안의현감 시절부터 구상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안의현감 시절의 연암은 글쓰기 방식으로서의 문체와 필생의 역점사업이었던 북학이 쟁점으로 떠올랐던 시절이었다. 안의현감 시절을 독립시켜 살펴본다는 것은 이런 변화의 추이를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연암 작품의 창작연대와 배경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은 시공간의 영향을 받는 연암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목차
1. 서론
2. 북학의 실현
3. 정조의 문체반정
4. 胡風에 대한 비난과 實學의 구현
5. 결론
참고문헌
참고 자료 1 : [안의현감 시절 연암의 문장]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