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Lee Byounghun[李炳憲, 1870∼1940], a famous confucian reformer for the transformation of the traditional Korean Confucianism in the late 19th century Japanese colonial era, Lee Byounghun visited China in 1914 and wrote Joonghwayoogi[中華遊記, the travel book around the China]. The purpose of his travel was to meet Kang Yuwei[康有爲], a famous confucian reformer in the late Qing and the Republic of China, to get some advice about the religious movement of Confucianism. It was the book that he did not only described China’s situation but also expressed his strong will for reform and recognition of surroundings. First of all, Lee Byounghun sharply criticize the Jaejojieon[再造之恩], an political idea that kings and their subjects in the late Chosun period blindly admired Ming China just because of it’s dispatch of forces and other aid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from 1592 to 1598, Imjinwaeran[壬辰倭亂]. He insisted that the loss of sovereignty of Korea in 1910 partly came from the wrong idea from the late 16th century and it’s continue since then. Lee Byounghun also dissented that the discrimination of civilization and barbarian based on Sino-centrism on the ground that it will go against Confucius’s teaching and human right violation. He had an opinion that the division would make frustrate the development of Confucianism. It was reasonable that Lee Byounghun accepted the Western civilization and detailed description of China’s railroad, trolley and so on in Joonghwayoogi. It was the affection of books about Western thoughts and religions issued in late 19th China made from 1903 that made him change into confucian reformer. However, Lee Byounghun regarded Kang Yuwei as his teacher but made no mention about Kang’s politcal reform ideas in his book. Most of all, he had no suggestion about how he could get out of Japan’s rule over Korea in that time. In addition, he had no gained confucian colleagues’s support about his reform ideas. It was probably one of the most important reason that we cannot find Lee Byounghun’s successor after his demise.
한국어
한말 유교개혁을 위한 孔敎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병헌은 1910년부터 1920년대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고 1914년 중국 방문에서의 견문을『중화유기』2권으로 기록하였다. 당시 여행 목적은 강유위를 만나 공교운동에 대한 가르침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이병헌은 『중화유기』에서 당시 중국의 상황과 함께 현실인식을 통하여 유교개혁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이병헌은 『중화유기』에서 조선 성리학의 커다란 흐름이었던 중화사상과 그 이론적 근거인 의리명분론을 비판하였다. 이병헌은 명말청초에 대한 새로운 역사해석을 통하여 임진왜란 이후 형성된 재조지은 논리와 숭명반청론의 허구성을 비판하였다. 이병헌의 이러한 인식은 단순한 과거에 대한 비판에 아니라 1910년 국권상실의 책임과 원인에 대한 규명이기도 하였다. 이병헌은 공자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것이라 보고 화이론에 의한 이분법적인 중화와 이적의 구분에도 반대하였다. 이병헌에게 중화와 이적의 구분은 공자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것이며 인권유린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교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이었다. 따라서 이병헌에게 서구문물의 수용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이는 『중화유기』에서 철도, 전차 등의 서구문물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이병헌은 한 국가의 발전에 정치상황과 사회경제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인식하였다. 정통 유학자였던 이병헌은 1903년부터 국제정세와 서양의 철학과 종교에 관련된 신학문 서적을 열독하였고, 특히 『청국무술변법』, 『중동전기』, 『태서신서』 등이 영향을 받았다. 『중화유기』의 이러한 내용들은 1910년대 당시 공교운동을 통한 사회개혁을 지향하였던 이병헌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병헌은 『중화유기』에서 당시 중국의 입헌론과 공화론을 둘러싼 논쟁 등을 언급하지 않았고 자신의 가르침의 대상으로 삼았던 강유위의 개혁사상에도 주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현실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없었다. 현실적으로도 이병헌의 공교운동은 당시 유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계는 이병헌 사후 이병헌의 개혁사상이 계승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이라 할 것이다.
목차
Ⅱ. 이병헌의 중국 여행과 『中華遊記』
Ⅲ. ‘再造之恩’ 논리와 華夷論에 대한 비판
Ⅳ. 유교 비판과 서구 문물의 수용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