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Baek-ya Kim, Jwa-Jin national Consciousness and Movement of national Sovereignty Restoration
초록
영어
This paper is a research on Baek-ya Kim, Jwa-Jin’s national consciousness and movement of national sovereignty restoration. It means a research on the development, the goals and the spirit of the movement of national sovereignty restoration (slavery emancipation, the establishment of Ho-myeong school etc) that Kim, Jwa-Jin spread before the national mourning, based on his family’s tradition, the local spirit and the experiences from the time he lived in Seoul that exerted enormous influence on his natural character and activities when he was young, and the improvement of his self-consciousness when he reached adulthood. Until 1905, the Confucian spirit and the spirit of ‘expelling perverse religions’ remained widespread in Hong-ju area. In that context, his awareness of slavery emancipation developed under various reasons, in which beside his ability to self-reflect there were also his innate bravery and courage. About Ho-myeong school, although there was much discussion about several problems, such as the time of establishment or the principle agent (of the school), the school was finally opened in 1908 with the decisive role of Kim, Jwa-Jin. When considering his relationship with figures and organizations in Seoul, and his opinions in that time, it can be said that his goals when opening that school was to educate the talented for the movement of national independence in the future, more than the renovation or enlightenment. Therefore the establishment of Ho-myeong school implies his preparation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Kim, Jwa-Jin did not pay much attention to the class contraction. Since the question of national contraction was more urgent at that time. Thus the slavery emancipation or the establishment of Ho-myeong school were carried out to the goal of ‘independence’, more than the ‘enlightenment’. That can explain the predomination of the Confucian spirit and the spirit of ‘expelling perverse religions’ over the ‘enlightenment’ spirit in his thought. The movements of ‘national sovereignty restoration’ and ‘independence’ of Kim, Jwa-Jin, taken priority over different contexts, have a specific relation between them. That is the former is the preparation of the latter, and the latter is the ultimate goal of the former.
한국어
이 논문은 백야 김좌진의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운동에 대하여 연구한 것이다. 즉 김좌진 의 타고난 품성과 어린 시절의 행적 그리고 자의식이 성장할 때까지 김좌진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가문의 분위기ㆍ교육ㆍ지역정서ㆍ서울에서의 체험 등을 바탕 으로, 김좌진이 국망 이전에 펼쳤던 국권회복운동(가노해방ㆍ호명학교 설립)의 실제와 목적 및 정신을 고찰한 것이다. 홍주지역은 1905년까지만 해도 봉건적·수구적·척사적 의식이 보편적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노를 해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민족의식을 갖도록 다듬어 준 여러 인연들, 이런 인연들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었던 그의 반성 능력, 무엇보다 도 사내다움과 호협적 기질을 타고난 본성으로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명학교에 대해서는 설립 시기에서부터 설립 주체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많지만, 1908 년 김좌진에 의해 주도적으로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호명학교 설립은 그가 서울에서 교 유하였던 인물이나 단체 그리고 이 시기에 그가 가졌던 사상ㆍ이념에서 볼 때 개명이나 계몽보다 구망 즉 미래의 독립운동에 참여할 인재를 육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호명학교 설립은 그의 독립운동의 준비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김좌진은 근 대의식이 비교적 옅은 사람이었다. 민족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가노해방이나 호명학교 설립도 ‘계몽’보다 ‘구망’을 위해 결행했던 것으로 보인 다. 그는 민족을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구망’의식이 매우 강했던 사람이다. 이 것은 그의 내면에 있던 민족의식과 구망의식이 계몽의식을 압도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김좌진의 국권회복운동(‘계몽’)과 독립운동(‘구망’)은 사내다움과 호협을 동경하던 그의 품성이 때와 장소에 맞게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난, 본질적으로는 서로 특수한 관계에 있는 사건이었다. 이 둘의 관계는 전자는 후자의 준비이고 후자는 전자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목차
1. 연구의 목적ㆍ주제ㆍ접근 방법
2. 민족의식의 형성
3. 김좌진의 국권회복운동
1) 가노해방
2) 호명학교 설립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