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reception ceremony for the King returning in Goryo dynasty was composed with two formalities which were song presentation by students of the national college and performances played by clowns, women dancers and musicians. In king Sejong’s era of Joseon dynasty, these two formalities had changed into four procedures. The first step was a military march and circuses by clowns with a small mountain shaped carriage in front of king’s parade as the marching band, and the second, the third and the forth were the presentation of songs by college students and elders and women dancers. The last step was the presentation of circuses by clowns near the two big mountain shaped stages which were in each left and right side of the main gate of the palace. Since then, this formality had became the national reception ceremony for the king returning in Joseon dynasty. Especially, there was a unique dance linked with two different types of dances in the forth procedure in the 23rd year of king Sungjong, the one was Hakhui(crane dance) and the other was Yonhwadaemu(lotus dance). However, until the 16th year of king Sungjong, Hakhui and Yonhwadaemu were not linked as one connected performance on the road. Therefore, Hakhui and Yonhwadaemu must have been connected between the 16th and 23rd year of king Sungjong’ era. Also, Hakhui has not been known of its origination and only it's the year of first description has been known as the 8th year of king Sejo’s era. However, by the description of the 6th year of king Sejong’s and the 16th year of king Sungjong’s, there is a possibility that Hakhui had been created in the 6th year of king Sejong’s, because Hakhui is the only circus that had been presented in front of the king’s parade on the road, and the procedure of a circus present in front of king’s parade had been created in the time of king Sejong 6th year. Also, as Hakhui had a meaning of purification and adding luster to king’s parade, Hakhui could have been created from the early stage of making the procedures of king returning receptions in the 6th year of king Sejong’. According to the record of the 6th year of king Sejong, the performances were played by clowns, and court dances were played by women dancers of belonging to the court. Therefore, the crane circus, Hakhui must have been played by clowns, and Yonhwadaemu must have been played by women dancers. Summing up, Hakhui and Yonhwadaemu were separated and also, their performers were different until the 16th year of king Sungjong, and after that, two performances had been linked to one and recorded as the only a serial court dance on the book {Ahkahkguibum} in the 23rd year of king Sungjong. Although, Bumyo ceremony(King returning ceremony) was originated from China’s, other performances suchlike a Hakyunhwadaemu were very unique cultures of Joseon dynasty. Also, there was no record of crane dance or lotus dance of the emperor returning ceremony in the history of China. Therefore, this existence of Hakyunhwadaemu was the discrimination of the king returning ceremony of Joseon dynasty different with the dynasty of China.
한국어
고려시대에 환궁의식은 유생의 헌가요와 팔방상과 양부가 합하여 올린 기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두 가지의 큰 틀로 된 형식은 조선 세종조에 약 4가지 형태로 분리 정립되, 행악(전후고취, 예산붕, 광대잡희)의 추가, 공연장소 및 담당자별로 분리되어 체계가 잡히고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 단종조에는 기로의 가요까지 첨가되어, 전체 5가지 절차(행악(고취악, 예산대, 나례), 삼가요(유생, 기로, 여기), 나례잡희(대산대, 나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정립된 절차는 후대에는 부묘 후 환궁의식의 규범이 되는 것으로 참작되었으나, 광대잡희나 여기의 가요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어 정지되기도 하였다. 조선 환궁의식 중 여기의 헌가요 절차에는 ‘학연화대무’가 공연되었는데, 이는 『악학궤범』에 기록된 유일한 도상의 정재이다. 이 중 학무는 문종조부터 세조 8년 사이 어느 시점에서 연화대무와 연결된 잡희이고, 학희(학무)와 연화대무가 처용무와 함께 연계된 것은 세조조라는 『용재총화』의 기록에 의해서도 학연화대무의 연결은 세조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학희의 발생은 이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인 세종 6년까지도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합설정재는 다만 궁정(宮庭)에서 연말에 연출되었으며 도상(途上)에서 쓰인 기록은 성종조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성종 16년에 비로소 도상에서 학무와 연화대무(교방 헌가요 중 하나)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학무(학희)와 연화대무는 하나로 연결된 정재가 아니었다. 즉, 성종 16년 당시 부묘 후 환궁시 연출되던 관행으로서의 학희는 악학궤범에서 교방가요라는 이름으로 연화대무와 묶여서 학연화대무를 올리는 것으로 정식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 24년 『악학궤범』에 학무가 연화대무에 연결되어 교방 여기들이 담당하였을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성종 16년의 기록에 의해 학희(鶴戱)와 교방헌가요(敎坊獻歌謠)는 분리된 것이었고 학희는 세종조 기록 등에 의해 광대들에 의해 연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환궁의식에 연출되었던 각종 공연은 부묘의식이 비록 중국의 예를 참조하여 정립된 것이기는 하나, 이와 같은 공연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일 수 없다. 중국의 조서나 칙서를 맞이할 때에 도상에서 각종 광대들이 공연을 펼쳤던 것이 우리나라의 고유한 손님맞이 의식이었던 점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도 중국의 환궁의식을 살펴보면, 이처럼 학희나, 연화대무를 연출했다고 하는 기록은 전혀 없다. 심지어 이 학희라고 하는 것은 중국 문헌에서는 정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없기에, 이 학무는 우리나라 고유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연화대무도 또한 중국에서는 여동이 탄생하는 형태의 창의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즉, 부묘 후 환궁시 왕을 맞이하는 의식 중 이 학연화대무의 연출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공연 문화이다. 따라서 이 학연화대무의 유무가 중국의 환궁의식과는 다른 조선 환궁의식의 특성을 나타내 줄 수 있는 변별 요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Ⅰ. 서론
Ⅱ. 조선 환궁의식의 확립과 ‘학연화대무’의 첨입과정
Ⅲ. 조선 환궁의식의 고유성, ‘학연화대무’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