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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使客宴의 女樂 · 男樂 推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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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s in Female and Male Entertainers in Joseon Dynasty Guest Feasts

조선시대 사객연의 여락 · 남락 추이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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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In its early period, Joseon had diplomatic relations with Ming(明), Japan(日本), Ryukyu(琉球), and Chinese barbarians(諸衛野人). Later, it engaged in diplomatic relations with Qing(淸), founded by the Jurchen[女眞族] called Yain(barbarians), and Japan. Joseon paid homage to China and had friendly relationships with Japan. This diplomatic approach aimed to have peaceful relations with other nations, so Joseon held feasts for foreign envoys and boosted friendships. Music and dance were indispensable for such feasts. In early Joseon period, in the feasts for king and officials(Weyeon 外宴) and foreign emissary feasts, musicians played instruments and female musicians danced and sang. Instrument performers continued to play their role until the second half of Joseon, but dancers and singers changed their roles as the time went. Thus, this study examines the changes in dancers and singers. Confucianism regarded music as a means of disciplining character, and as a shortcut to changing customs into beautiful ones. Thus, Joseon, which embraced Confucianism as the philosophy of governing the state, regarded it against morality when the king and his subjects -who were supposed to lead the people into the right way-were enchanted by the beauty of female entertainers. Thus, beginning in 1433 (the 15th year of King Sejong’s reign), male entertainers were used in feast for king and officials. However, this practice was not successfully established, but continued only until the early years of King Sejo’s reign. With the reform mood sweeping the government after King Jungjong’s Rebellion(中宗反正) to support the enthronement of King Jungjong (1506), beginning in 1511 (the 6th year of King Jungjong), male entertainers were used again for feast for king and officials, but in 1520 (the 15th year of King Jungjong’s reign) this practice discontinued. In the later years of King Seonjo (reigning in the period of 1567~1608), when a great number of Confucian scholars actively engaged in political affairs, male entertainers were normally supposed to be used in the feasts for king and officials, and this practice was actually established after King Injo’s Rebellion (仁祖反正 1623). Foreign emissary feasts used music as well. In the early Joseon, when Neo-Confucianism was accepted and studied, male entertainers were used only for about 35 years in the feasts for king and officials. As such, in Chinese emissary feasts, throughout the earlier period of Joseon, female entertainers were used in Seoul and provincial regions, and in Japanese emissary feasts, male entertainers were used in Seoul for about 40 years. In the early years of King Gwanghaegun’s reign, male entertainers were briefly used in provincial regions, and in other times, female entertainers were used. Later, when Joseon developed Neo-Confucianism into its own model, the practice of using male entertainers in feast for king and officials was completely established. As such, in Chinese emissary feasts, male entertainers were used in both Seoul and provincial regions throughout the second half of Joseon. Meanwhile, in the second half of Joseon, Japanese emissary feasts were held only in Dongnae(東萊), and the Japanese did not understand the purpose of using male entertainers but strongly demanded female entertainers be used. Such demand was accepted.

한국어

조선 전기에는 명(明)․일본․유구(琉球) 및 제위야인(諸衛野人) 등과 외교관계를 유지했고, 후기에는 야인으로 불리던 여진족이 세운 청(淸) 및 일본 등과 교류했는데,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事大)를 했고, 일본 등에 대해서는 교린(交隣)을 했다. 사대교린은 평화적인 관계를 위한 것이므로, 사객(使客)이 오면 연향을 베풀어 친목을 도모했다. 연향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악가무이다. 조선 건국 초에 대개 외연과 사객연에서 악공이 악기 연주를 하고 여악이 춤과 노래를 했는데, 악기 연주자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변동이 없지만, 춤과 노래 담당자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따라서 본고의 주제인 ‘여악․남악의 추이’란 바로 춤과 노래 담당자의 변동에 관한 것이다. 유학에서 악은 인격 수양과 아름다운 풍속을 이룰 수 있는 방편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유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는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하는 임금과 신하의 연향에서 여악의 아리따운 자태에 현혹되는 것을 예에 어긋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1433년(세종 15)부터 외연에 남악(男樂: 舞童)을 쓰기 시작했으나, 정착되지 못하고 세조 초년까지만 시행되었다. 중종 반정(1506) 이후 개혁적인 분위기 속에서 1511년(중종 6)부터 다시 외연에 남악을 썼으나, 1520년(중종 15)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사림들이 정계에서 대거 활약한 선조(재위 1567~1608) 후년에는 외연에 남악을 쓰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졌고, 인조 반정(1623) 이후의 조선 후기에는 완전히 정착하였다. 사객연에서의 용악은 외연에서의 그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주자 성리학을 수용하여 이해해가는 단계인 조선 전기에는, 외연에 남악을 쓰는 제도가 겨우 35년 남짓 시행되었을 뿐이다. 이를 반영하듯 조선 전기의 중국 사신연은 사신이 완곡하게 여악을 거절한 경우와 선조 말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서울과 외방에서 여악을 썼다. 일본 사신연은 1433년(세종 15) 이후 40년가량 광해군 초년에 잠시 외방에서 남악을 쓴 것을 제외하고는 서울과 외방에서 여악을 썼다. 주자 성리학을 자기화하여 조선 성리학으로 발전시킨 조선 후기에는 외연에 남악을 쓰는 제도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조선 후기의 중국 사신연에도 서울과 외방에서 모두 남악을 썼다. 한편 임진왜란의 여파로 일본과 국교를 단절했다가 1607년(선조 40) 국교를 재개했는데, 일본 사신의 입경(入京)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일본 사신연은 동래에서만 행해졌는데, 왜인들이 ‘남악을 쓰는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악 공연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람에 조선 후기 일본 사신연에서는 교린의 차원에서 부득이 여악을 썼다. 1465년(세조 11) 양성지의 ‘남악의 가무와 의관이 볼품없으니, 왜야인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견해와 1714년(숙종 40) 이병상의 ‘저들이 비록 오랑캐이지만 우리의 접대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예의로 상대해야 마땅하다’는 견해는 조선 전기와 후기의 사객연 용악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목차

국문요약
 Ⅰ. 序
 Ⅱ. 조선 전기 사객연에서의 用樂
 Ⅲ. 조선 후기 사객연에서의 用樂
 Ⅳ. 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김종수 Kim, Jong-su.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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