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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원균 이미지’의 변화상과 ‘원균 비판’의 정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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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on the Political Recognition appeared in Won Gyun criticism under the late Chosun Dynasty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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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research aims to investigate the reasons why people close to the Won-Kyun criticized him severely than anyone. In addition, why criticism weren't died away over the years and reproduced persistingly. This research is through the analysis of Won Kyun's image, which was evaluated by his people like political forces, army leaders, and relatives. concretely, (1) The cause and actual condition of change of recognition, that was diverted from faithful to disloyal subject in Royal Court's an official records. (2) The logic and actual condition of group related with Won Kyun had slander on him. (3) We are going to look at the problems why Won Kyun's people made disillusive images by the [Bang Nak An Jeon] that is 'treading Won Kyun's typical case. For now, researcher analysis the criticism by people close to Won Kyun in three aspects First, Seo-In(West Party) who had a same coloring partisan had political fear. That trying to solve the problem by so making Won Kyun's irresponsible images. Seo-In such as Cheonro-Cha, Jungmok-An, Kyeseon-Yun including Sic-Lee suffered the shame of Won Kyun's bad defeat. Therefore, that made a his damaging accusation. Futhermore, they feared what spread of ‘his incompetent-images’. Seo-In were distinct from Dong-In, because Seo-In criticize mainly Won Kyun's realistic incompetent and irresponsible attitude. However, Party of 'impartiality’ showed moderate attitude to Won Kyun. They evaluated Won Kyun through Theory of 'impartiality’, which want a person of full capacity than ideal reformation of system. Second, Dong-In(East Party) criticize mainly problem of moral what Won Kyun showed. Wan-Kim, Seongryong-Ryu blamed Won Kyun through 'Theory of troublesome drunkard, women and gambling'. Through this, they tried to shift responsibility on him by 'Theory of blame-Won Kyun'. But Actually Wonik-Lee's plan which ‘cut off sea route’ called on the defeat completely. Third, relatives and army leaders had a complex mind about Won Kyun. Dukheung-Lee who greatly liked Won Kyun, regret supporting Won Kyun after he defeat in the war. This may explain why people who support to Won Kyun should have suffer hurt and pains. Of course, there are an honest army leaders. They criticized Won Kyun's incompetency, but they can't away with ridicule about him. Also, penalty policy on Won Kyun's Group of Government gave sense of fear to Bangjun-Ahn who relative of Won Kyun after Japanese Invasion War in 1592. If they don't criticize Won Kyun, they can't protect their family from enemies who don't like Won Kyun. Nevertheless, these critical have a big problem. They were stingy about reveal the truth what Won Kyun had a worry and tried to achieve. They should have try to ' treading Won Kyun' for their survival. These behaviors have reproduced that Won Kyun's bad image, up to this day consistently.

한국어

임란 후 전쟁 책임에 대한 공방과정에서 왕의 비호를 받은 원균은 충신의 반열에 올랐지만 측근은 패전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자주 왕과 조정은 이들에 대한 처벌 가능성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원균 측근’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원균 때문이다’라는 논리를 전파하였고, 그런 조치에 대한 짙은 공포감과 면피하고 싶은 인간적인 고민이 이들의 각종 문집에서 ‘원균 밟기’ 의식과 ‘원균 회피 문체’로 나타났다. 첫째, 같은 당색인 서인들이 가졌던 정치적 공포였다. 그들은 무책임한 원균 이미지를 고양하는 방식으로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택당 이식을 비롯하여 차천로, 안중묵, 윤계선 등 서인들은 임진왜란에서 참패한 같은 당색의 원균이야말로 용납될 수 없는 자기 당색의 수치로 보았고, 이에 그 비난의 강도가 가혹하였다. 서인들은 주로 원균의 현실적인 무능력과 무책임에 대한 비판을 주로 했다는 점에서 동인과는 달랐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서인이지만 탕평파들은 이상적인 제도개혁보다는 능력 있는 인물을 기용이라는 관점이 중요햇기에 원균을 보는 것도 도덕적 폄훼가 아니라 능력 여부였다. 둘째, 동인들은 원균이 보여준 불의와 불충과 같은 도의적 문제를 주로 비판하였다. 권율이 만든 ‘원균도망론’에 이어서 김완이나 유성룡은 ‘원균 주색잡기론’을 들고나왔다. 그 위에 다시 허목처럼 ‘무고와 참소의 원균이미지’를 주조하였다. 동인들은 인조반정으로 현실정치에서 점차 배제되었지만 전란을 진두지휘한 사족들이 많았고, 이들은 향촌사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데 전쟁때 세운 전공이 유의미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신화화할 필요성 때문이라도 원균과 같이 도망⋅비겁⋅간신⋅무능력한 인물은 극도의 혐오대상이었다. 셋째, 친척, 의병장들은 복잡한 심경의 원균관을 가지고 있었다. 원균을 깊이 아꼈던 李德馨조차 패전 후 자신이 굳이 과거에 원균을 지지했던 일을 후회하였던 것처럼, 당대에 원균을 따랐던 사람이라면 모두 겪어야 했던 공통의 상처였고, 회한이었고, 고통이었다. 물론 양심적인 의병장 趙慶男처럼 일면 원균의 무능을 비판하면서도 『達川夢遊錄』에서 원균을 조롱하는 것은 참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살아야 할 현실을 위해 원균을 비판하지만 그래도 한없이 추락하는 원균이미지를 보면서 그래선 안 된다는 고뇌의 흔적도 보인다. 그리고 친척인 安邦俊의 원균 비난은 왜란 직후 그러한 원균 인척으로 사는 삶이 닥친 공포의 반영이었다. 원균의 친척이기에 원균에게 무능을 넘어 도덕적 약점에 모든 것을 덧씌우지 않을 경우 원균을 곱지 않게 보는 수많은 적들로부터 자신과 가족 그리고 가문을 지킬 수 없었다. 선조는 임금이고, 왕이 하사하는 사랑이나 신뢰야 한번 승하하면 그뿐,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은 원균을 질시하는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00년을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方樂安傳』은 그러한 원균의 측근들이 가지는 현실적인 고통에서 발아된 ‘원균 회피 문체’ 나아가 ‘원균 밟고 가기’ 의식이 집약된 것이었다. 방덕룡은 임란 緖戰부터 칠천량 해전까지 시종일관 원균에게 충성하고 원균의 수하로서 공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글의 주 내용은 충군애국으로 무장한 방덕룡이 상관인 원균의 온갖 학정과 인간적인 부족함에도 원균 곁에 머물며 의리를 지켰고, 원균의 어리석은 지휘에도 순응하면서 용감하게 적병을 물리치는 등 패전지장 원균의 부하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도 스스로의 능력과 인품으로 잘 이겨낸 참으로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글은 한때 원균의 수하로서 적을 물리치고자 동고동락 했던 동지들이 자신의 지휘관을 亡將, 怯將으로 폄훼해야 살아남는 시대적 억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확인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이런 부류의 글들이 가지는 큰 문제점은 원균이 진정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이룩하려 했는지를 ‘진실’을 캐는 데는 인색했다. 원균은 유전자 시절부터 능력이 없고 주색잡기에 빠졌고, 탐욕하고, 남의 공(이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惡漢이미지에 가두기만 하면 그들의 정치적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 와중에 원균과 어떤 형태로든 연을 맺고 살던 사람들은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정쟁의 칼날에 숨죽여야 했고, 어찌하던 살아남기 위해 ‘원균 밟기’를 시도해야 했다. 그런 ‘삶의 공포’야말로 오늘날까지 원균을 다양한 ‘몰인격의 악한’ 이미지로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다.

목차

Ⅰ. 서론 : 원균밟기의 절박성
 Ⅱ. 충신에서 간신 이미지로 전환
 Ⅲ. ‘원균 관계자’의 원균 비판
 Ⅳ. 『方樂安傳』 사례에 나타난 ‘원균 밟기’
 Ⅴ. 결론 : 공포가 만든 폄훼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저자정보

  • 김인호 Kim, In-Ho. 동의대학교 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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