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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성사와 천도교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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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Son Byong Hee and 3.1 Independence Movement

이현희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11호 2006.06 pp.247-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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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Son Byong Hee established singular leadership and made himself as the top leader after the failure of Donghak peasantry movement in 1894. Son-Byong Hee was the driving force of 3.1 independence movement. He mustered men under his banner for the racial movement. Finally he succeed 3.1 independence movement with a christian, a buddhist and a student class. Son had a leadership of adamant and he led of new civilization movement. Accordingly a like minded person was under the presence of him. He was a national leader.

한국어

1919년 3월 1일 민족항쟁을 추진, 전개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도적 임무를 담당한 계층은 종교계였으며, 그 중에서도 의암 손병희(1861~1922)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계가 주동이 되었다. 따라서 천도교는 민족운동의 모의, 준비와 자금지원, 동지를 규합하는 중추적인 임무를 스스로 담당하여 민족항쟁을 이끌어 나갔다. 천도교인이 1910년 8월이래 국권피탈은 절대로 부당한 것이며 이를 저지하지 못하였던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그해 9월부터 천도교의 지도자 의암이 동학혁명의 재현을 위해 봉황각이나 상춘원 자택 등을 통해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동학혁명의 민주주의적 구국의식이 충만하였던 천도교인이 앞장서서 설득과 자금지원으로 기독교, 불교, 학생대표와 손잡고 전국적인 3.1운동의 거사를 성사시킨 것이다. 당시 천도교인의 숫자는 흔히 2백여 만명 정도였다고 하며 풍족한 자금과 활발하고 치밀한 전국적 조직, 의암 등 지도급 인사들의 인재 영입중이 종단을 대표하여 타종교단체에까지 자금을 지원하면서 계획단계에서 대중화운동단계로까지 동참적 항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이는 동학의 개벽사상과 시천주, 사인여천의 민족 구국이념을 편 수운 최제우의 인류구원사상에서 출발하였다고 본다. 수운,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 등 동학 지도자가 개혁과 자립사상을 종단적 차원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강압적으로 탈취하고 영원히 식민화하려는 불순한 저의가 담긴 일제의 한국 강점을 결연히 분쇄하려는 민족주의적 혁명의식으로 확대, 마침내 세계적인 찬사를 받은 3.1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권폭압 통치하에서 천도교인만 가지고는 균형있는 성사가 불투명하다는 천도교 총수 의암의 판단과 비전있는 리더십에 따라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었다. 더욱이 기독교, 불교 등 타종단과의 연대제휴가 전 국민적 지지동참을 유도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대중적, 일원적, 비폭력적 투쟁방법을 택해 민족대표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대중적 동참의식에 따라 중앙학교팀, 유교계와 학생층도 계획단계에서부터 함께 준비하였으나 실천 단계에서 연학의 불충분과 기성세대와의 의견차이로 이 두 계층은 민족대표 33인 구성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뒤에는 다른 형태로 거국거족적 동참항쟁이라는 자주자립의 이념에 따라 함께 격조높게 이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철저한 사전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1919년 3월 1일 국민국가 실현과 완전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개된 3.1운동은 천도교의 합리적인 민중운동 3대 원칙에 따라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는바 천도교와 제3세 교조 의암 손병희는 강한 리더십에 따라 그 선도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904년까지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지도하였던 의암은 저술과 논강을 통해 외국에서의 발전하는 문물을 접하고 나서 반봉건운동과 함께 격변하는 시대정세에 능동적으로 부응, 대처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체험적으로 직감하여 신문화 지식운동에 앞장서서 진두지휘 하였다. 평생을 구국의식으로 일관한 의암은 신문명의 감각이 뛰어나 이미 대한독립선언이나 2.8독립선언 등의 투쟁의식을 인식하고, 이 혁명적 항쟁을 지휘하여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것만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선양, 실천하였다. 이에 아시아를 격변, 개혁케 한 3.1운동 직후 국내외에 7,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거나 될 찰나에 있었을 때 의암이 몇 개처의 임시정부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수반격인 대통령에 추대되고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의암은 3.1운동때 서대문형무소에 자진 구금되었다가 고문으로 나와 순국하였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의암은 독립운동상에서나 대중들에게 덕망과 헌신적 구국의식의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그는 천도교계만의 지도자가 아니며 거국 거족적 3.1운동을 지휘한 민족적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목차

1. 서론
 2. 천도교인의 구국의지
 3. 손병희성사의 애국사상
 4. 타종단과의 제휴
 5.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배부
 6. 임시정부의 대통령 추대계획
 7. 대한민간정부의 계획과 천도교의 자금지원
 8. 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이현희 Lee, Hyun Hee. 성신여자대학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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