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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한국사회와 교조신원운동 - 동학농민혁명의 배경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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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cial Problem in 19th Century and Remission Movement of Choi Jewoo

이현희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8호 2004.12 pp.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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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At the end of 19th century, korean society confronted a big crisis caused by western impact and exploitation of feudal govern class. Meantime Choi Jewoo attained spiritual enlightenment which contains principle of humanism, anti-feudalism and doctrine and independence, Donghak. This idea was spreaded in korean people because it awakened them to realize social absurdity and to demand their human rights. But the government executed Choi Jewoo because they accepted Donghak as a menace of their interest. Even the execution, the Donghak organization was well developed. They organized their association, published their sacred books and settled their religious ritual. Consequently many people joined in Donghak but this provoked another suppression of government. To obtain the freedom of faith, Donghak organization appealed to government for remission of Choi Jewoo and demonstrated in 1890. Despite of their efforts including appeal to the king, they could not achieved their final goal. And religious movement became social and political movement. Donghak believers collected in Boeun and Keumgu. The Keumgu congregation, lead by Chon Bongjun, developed into political movement which insist national independence against western and japanese power, and soon became main influence of Donghak peasantry movement despite of Donghak organization leading group's moderate opinion. Chon Bongjun, the leader of Keumgu congregation and Donghak peasantry movement, was an intellectual who learned Choi Jewoo's idea with confucian background. He leaded Kobu rebellion in which thousands of farmers participated because of corruption of provincial governor. As corruption had not been stopped, he ession . Such movement became anti-government struggle and ssion he raised with revolt, the first Donghak peasantry movement, leading 4000 peasantry army. His idea of rebel was based on confucian humanism and Donghak's independent idea.

한국어

19세기말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종교, 사 상적으로 진공상태에 빠진 당시 농어민대중에게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는 동학이 지배층의 탄압, 부패와 외세의 사회경제적 침략에 따른 위기를 구할 수 있는 참신한 메시아적 존재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학사상은 기존 봉건사회 질서와 지배세력의 기득권을 위협 하는 원리와 요소로 인식되어 제1세 교조 수운은 혹세무민의 죄목으 로 처형당하였다. 이후 동학의 교세는 잠시나마 위축되었으나 그의 제자인 해월 최시형(1827-1898)에 의해 1870년 후반에 이르러는 교단의 지도체제가 확립되었고, 동학의 기본경전이 간행되었으며, 동 학의 주요 종교의식과 제도가 확립되면서 그 교세가 점차 확대되었 다. 이 과정에서 동학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에 1890년 초 에 들어서면서 동학교단은 교조신원운동이라는 합법적인 청원, 공인 운동을 전개하여 국가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복합상소에 의한 왕의 호소에 대한 직접 상소마저 실패하게 되자 그들은 교조신 원운동이라는 온건한 종교운동의 범위를 벗어나 과감히 정치적 성격 을 띤 집단적 민중운동으로 전환하여 갔다. 해월 중심의 교도들은 보은집회를 개최하였고, 이 시기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도 금구집 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구집회는 수운의 신원을 위해 계획 실행된 종교적 성격의 보은집회를 척왜양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적 집회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고창태생으로 茂長에서 대규모의 봉기를 실현시킨 민중혁명가 녹두 전봉준을 주축으 로 한 금구집회는 이후 동학지도부의 노선 과 달리하면서 투쟁의식을 강화해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주도적이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곧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각 큰 집 회를 통해 반봉건, 척왜양창의의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정치적 대정 부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이후 민족의 근대적 사회개혁을 실현코자 한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동학접주 전봉준(병호․명숙․泳準․녹두)은 유교의 교양과 수운의 동학사상 을 익힌 선비로 30대 후반 고부민란때 수천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 고 관아를 습격, 자유 정의 진리의 반봉건․반외세․반부패에 반기 를 들고 나섰다. 그러나 고부군수의 탐학이 중지되지 않자 같이 고 향인근인 고창 무장에서 4천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대규모의 전 쟁형태인 제1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오륜 오상, 四維 등을 살리는 유교의 인간성회복과 동학에서의 내 것을 지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았으니 이는 그가 외세를 배척하려는 동학사상에서 출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선비정신을 구비한 훈장 접주로서 현실개혁의 변혁사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혁명 적 투쟁이었음을 분석적으로 해석 평가해 볼 수 있겠다.

목차

1. 서론
 2. 社會經濟的 배경
  1) 開港후의 사회경제
  2) 帝國主義 침투와 경제적 변화
  3) 農村社會피폐의 극대화
  4) 農村社會의 抗爭意識 태동
 3. 敎祖伸寃運動과 반정부형태
  1) 東學敎團의 경영
  2) 公州狀辭
  3) 參禮集會
  4) 서울의 伏閤上疏
  5) 報恩集會
  6) 金溝集會
 4. 全鐵爐의 胎生과 農民革命準備
  1) 출생지 문제
  2) 전철로의 농민혁명준비
 5. 결론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저자정보

  • 이현희 Lee, Hyun-Hee. 성신여대 명예교수, 한국근현대사, 동학학회 명예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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