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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 일대의 갑오년 상황과 동학농민군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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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tuation of Naepo(內浦) and The Uprising of Donghak Peasant Army 1n 1894

신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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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First Chinese-Japanese War in 1894 began in around Naepo(內浦) area. Japanese cruiser attacked the Qing Empire warship at Asan vey(牙山灣) and Japanese 9th mixed brigade(混成第9旅團) attacked the Qing army at Sungwhan(成歡) in July, 1894. Japanese had great victory against the Qing’s Navy and Army in Naepo. Naepo residents had been witnessed the combats. Nevertherless, the Donhak around Naepo could gather soldiers for an armed uprising in October, 1894. The purpose of this uprising was the expulsion of the Japanese army. Donghak Peasant Army gathered from the 18 districts of Naepo attacked important administrative district, castle of Hongju(洪州城). Donghak Peasant Army was thousands. They joined Jun Bong-Jun(全琫準) who were togethered with Donghak Peasant Army in Jeolla Province(全羅道) attacked the castle of Gongju(公州城). The surprised attack which the Japanese army attacked the Gyeongbokgung(景福宮) for King Gojong holding as a hostage triggered the gathering of Naepo Donghak Peasant Army. They had arisen for the National crisis. The Donghak Peasant Army, however, snatched Weapons and military reserves in office conflict with officials and snatched landowners’ property brang the conflict with the ruling classes. Especially, the situation got worsens in Taean(泰安) and Seosan(瑞山) because of officials killing, a naval base occupation. The Naepo Donghak Peasant Army attacked by the army from Seoul and the Japanese army. The light-weaponed Donghak Peasant Army crucially suppressed by Japanese army.

한국어

청일전쟁은 충청도 내포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1894년 7월 아산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 함대가 청국 함대를 공격하고, 성환에서 일본군 혼성9여단이 청국군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일방적으로 청국의 해군과 육군을 격파하였고, 청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내포 주민들은 청국군을 연파한 일본군의 위력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했으면서도 내포 일대의 동학조직은 가을 봉기에 대거 참여하였다. 봉기의 목적은 일본군을 조선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내포 18개 군현에서 조직된 동학농민군은 이 지역의 중요한 도시인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 수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전라도에서 봉기한 전봉준이 대규모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공주성을 목표로 북상하자 이에 호응해서 홍주성을 공격한 것이었다. 내포는 공주성의 배후지였고, 내포의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전투의 최대 지원세력이었다.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를 촉발시킨 것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일본군 혼성제9여단이 경복궁을 기습 점거하고 국왕 고종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었다. 임란 이후 최대의 위기로 인식되었다. 공주 홍산 은진 부여의 유생들은 즉각 창의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충청감사 이헌영과 선무사 정경원은 만류하였다. ‘종묘와 사직이 안정’된 상태라는 것이다. 관료와 유생들이 시국관은 차이가 현저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기습과 국왕의 인질 사태 그리고 청일 군대의 전쟁 등 유례없는 국란을 보면서 유생들은 시급한 위기로 보았고 관료들은 국왕이 해를 입을 것을 걱정하였다. 동학 조직은 유생들보다 더 큰 위기로 보고 직접 대응할 것을 결정하였다. 내포의 동학농민군은 선무사의 만류에도 봉기를 준비하였다. 10월 말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이 전해진 직후 내포 일대는 동학농민군이 무장봉기해서 관아를 압도하였다. 하지만 관아의 무기와 군량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관리들과 충돌이 일어났고, 양반지주들의 재산을 빼앗으면서 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특히 태안과 서산에서는 지방관을 살해하였고, 충청 수영(水營)까지 점거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내포는 도순무영에서 진압군을 파견해야할 주요 지역으로 부각되었고,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도 주요 타격지역으로 선정하였다. 결국 내포의 동학농민군은 진압군의 정면에 위치해서 혹독한 공세를 받게 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내포 일대에서 벌어진 청일전쟁과 창의
 3. 내포의 동학농민군 봉기와 태안・서산의 지방관 피살
 4. 기포령 이후 내포 동학농민군의 수영과 관아 점거
 5. 맺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신영우 Shin, Young-Ou. 충북대 사학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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