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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의 진압과 민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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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ppression of the Donghak Peasant Army in Gochang Region and Minbogun

신영우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26호 2012.12 pp.9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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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article is about the blood protest of the Donghak Peasant Army in Gochang Region on December, 1894. The root cause of the First Sino-Japanese War was between Qing Dynasty of China and Japanese Meiji government over the control of Joseon. In the midst of war, The Donghak Peasant Army rose against the Japanese Imperial Army. In consequence of a crushing defeat in the Ugemchi(牛禁峙) battle and Munui(文義) battle the Donghak Peasant Army suffered. Besides of the Japanese Imperial Army, Tongwiyoung(統衛營), Jangwiyoung(壯衛營), the some parts of the Joseon military units were forced to suppress the Donghak Peasant Army. Shon Hwa Jung(孫化中) was one of the powerful Donghak Peasant Army leaders who based in Gochang region. This Shon’s Gochang unit could not participated in Samrae(參禮) because of the Naju Minbogun(民堡軍) which was against the Donghak Peasant Army. Shon Hwa Jung attacked the Naju Minbogun but it was defeated. The Shon’s Gochang unit returned to their homeground. The Japanese Imperial Army and the Jangwiyoung chased them and occupied the Gochang. It was an uncontested. The Gochang Yangban(兩班) formed a military organization with the energetic co-operation of the Gochang Minbogun for remaing the Shon’s Gochang unit. They wanted to get back their glory days against the Shon’s Gochang Donghak Peasant Army unit.

한국어

1894년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벌어진 공주 우금치전투와 문의전투 이후 진압군이 동학농민군을 압도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다. 진압군은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와 경군의 통위영․장위영․경리청․교도대․심영(강화영)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각지에서 결성된 민보군이 동학농민군 가담자를 체포해서 지역 근거를 무너뜨렸다. 이 논문은 고창․무장․흥덕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진압된 과정을 검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다. 전라도 일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무력에 의해 우금치와 연산, 논산전투에서 패배하고, 금구 원평과 태인전투에서 패배한 후 궤멸하였다. 무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접주 손화중은 전봉준․김개남과 더불어 남접농민군의 3대지도자 중 한 사람이지만 9월 재봉기의 집결지였던 삼례에 가지 않았다. 나주에 결성된 민보군이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 주력이 북상할 때 나주 민보군이 후방의 주요 근거지가 공격할 것을 우려해서 먼저 나주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손화중은 11월 23일 나주 남산촌에 진을 치고 읍성 공격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이를 알고 성내의 민보군이 기습해왔다. 민보군이 대포까지 가져와서 발사를 하자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놀라서 패산하고 말았다. 화승총과 탄환 등 손화중 군에게 압수한 노획물은 사창 하나를 채울 정도였다. 모리오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군과 경군 지대는 고창 일대의 손화중 군이 나주에서 패산한 뒤에 정읍과 고부를 거쳐 흥덕․고창․무장으로 들어왔다. 흥덕은 12월 1일, 고창은 2일, 무장은 3일부터 5일까지 3일이나 머물렀다. 손화중의 근거지는 이때 샅샅이 수색되었다. 12월 6일 무장에 들어온 지대는 영광으로 넘어가지만 고창에는 장위영 병대 21명이 남았고, 무장에는 장위영 병대 41명이 남아 민보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수색해서 체포하였다. 무장대에서 몰수한 동학농민군의 무기와 군량만 헤아려도 매우 많았다. 화승총 750자루와 천보총 32자루 그리고 백미 560석과 대포 2좌가 포함된 규모였다. 나주 공격 때 빼앗긴 것을 합하면 손화중 군의 위세를 알 수가 있다. 흥덕의 양반 유생들은 동학농민군 세력이 강성했을 때부터 민보군 결성을 시도하고 있다. 11월 중순에는 고창에서도 민보군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군 지대가 흥덕과 고창에 들어온 이후에 비로소 민보군이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민보군은 경군을 도와서 동학농민군 지도자와 그들의 근거지를 기습해서 체포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런 도움으로 체포된 동학지도자는 놀랄만한 수였다. 무장에서 체포된 대접주만 12명에 달하는데 여기에 손화중ㆍ홍낙관ㆍ차치구를 포함하면 모두 15명이나 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고창 일대의 동학농민군과 진압군
  1) 1894년 12월 초 일본군과 경군의 전라도 지역 진입
  2) 무장 일대의 동학 세력과 나주공격의 실패
  3) 일본군과 경군 병대의 고창 일대 순회
 3. 고창 일대의 동학농민군 체포와 민보군
 4. 맺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신영우 Shin, Young-Ou.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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