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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敞地域 東學農民軍 進擊路의 實證的 考察

원문정보

An Experimental Study of Gochang Peasant Army’s Marching Road

고창지역 동학농민군 진격로의 실증적 고찰

진윤식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26호 2012.12 pp.6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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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About 3,500 peasants army of Son Wha-joong who started at Mujang, Gochang, and Heungdeok knew their apparent destination: only toward Gobu. For Gobu people including Jeon Bong-jun, Kim Do-sam, Jeong Ik-seo had severely been exploited and oppressed for a while, it must have been at the front punishing the corrupt governing. Soothing their bitter grudge appears to be the first objective of the seizing Gobu fortress before advancing to occupy Jeolla Gamyeong and to rule out the aristocracy in Seoul. The regional name, Mujang(茂長) is not a simple place name but the symbolic pronounce of Son Wha-joong Po(pack) that represents for the force in Nam Jeop(larger pack). Besides, since Kim Deok-myeong Po of Geumgu and Kim Gae-nam Po of Taein have been merged into them Son Wha-jung Po was the collected force around Honam. The sand plaza at Dangsan(Gusunae) village in Mujang-hyeon is the very rising place of the united force. It seems adequate to understand that not only the Declaration but also the Four Principles and the Twelve Rules have been established from the beginning of the Mujang Rise and have been guiding ideology by the identical leadership at the identical place on the basis of moral doctrine rooted in the ideal of Chung Hyo(Loyalty and Filial duty) and In Eui Ye Ji(Benevolence, Rightesousness, Courtesy, and Knowledge).

한국어

이 글은 1894년 3월 20일 무장포고문을 공포한 이후 동학농민군이 진격했던 경로에 대한 실증적으로 고찰한 글이다. 1894년 당시의 도로상황을 촌로(村老)의 증언에 바탕해서 진격로를 밝히고 있으며, 이 논문은 첫째,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무장)포고문과 격문, 사대명의, 기율 등의 공포 시기와 장소 등을 논하고 있고, 둘째, 무장기포 이후 동학농민군 진격로에 대해 실증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무장, 고창, 흥덕에서 출발한 3500여명의 손화중포 농민군은 그 목적지가 분명했다. 그들은 오직 고부만을 향해 진격했을 뿐이다. 그동안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를 비롯한 고부인민들이 당한 수탈과 학대가 너무 컸기에 그에 대한 징치(懲治)를 먼저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부성 점령은 전라감영을 점령하고 서울로 올라가 권귀(權貴)를 몰아내기에 앞서 고부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것이 그 첫 번째 목적이었다고 보여 진다. 무장(茂長)이란 지명은 단순 지명이 아니라 손화중포를 의미하는 대명사였으며, 손화중포는 남접을 대표하는 세력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금구의 김덕명포와 태인의 김개남포가 합류 했으니 호남 일대의 세력 모두가 총 동원 된 것이다. 그 출발선이 바로 무장현 당산(구수내)마을 앞 모래사장 인 것이다. 무장(茂長)이란 지명은 단순 지명이 아니라 손화중포를 의미하는 대명사였으며, 손화중포는 남접을 대표하는 세력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금구의 김덕명포와 태인의 김개남포가 합류 했으니 호남 일대의 세력 모두가 총 동원 된 것이다. 그 출발선이 바로 무장현 당산(구수내)마을 앞 모래사장 인 것이다. 아울러 포고문뿐만 아니라 4대 명의와 12개조 기율 또한 무장기포당시부터 준비되었으며 충효와 인의예지를 근간으로 하는 도덕적 규범의 바탕에서 무장이라는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지도부에 의해 운영된 지도이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목차

국문초록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진중 측근자 고 김흥섭옹의 회고
  2. 무장 당산(구수내)에서의 포고문 발표와 진격
  3. 줄포 도착과 고부성 공격
  4. 백산성 점령과 군제 개편
  5. 4대 명의와 12개조 기율의 작성 시점과 장소 문제
 Ⅲ. 마무리 글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진윤식 Jin, Yun-Sik.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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