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논문검색

백산대회와 동학농민혁명 - 논쟁점을 중심으로

원문정보

Baeksandaehoe and the Donhak Peasant Revolution : On the Debates of Historical Facts

임형진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25호 2012.08 pp.111-146
피인용수 : 0(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초록

영어

The Donghak Revolution have been developed in Jeolla Province during 10 months. In spite of many studies, historical impacts arranged by such area. In the beginning of the revolution, The Baeksandaehoe have hold and the army of rural peoples had been built. The Cause of the four principle in proclamation and 12 points morale made by Baeksandaehoe. And the army established ranks and divisions. In spite of that facts of history, Baeksandaehoe had no clearness in studies. Baeksan was regarded the important point from January in 1894. This place was used by Cheon, Bong-jun as the headquarters and was had main area from March, in 1894. The importance of Baeksan have been regarded as kobu in main spot. As historical facts, Baeksandaehoe could be evidence in some days difference. At that epoch, the peasant army of one ten thousand soldiers was assembled in Baeksan. The Donghak army had organized the Baeksan peasant army as the official division. The main debate on Baeksandaehoe was the campaign in itself or not, the exacted date, the characteristic of Donghak peasant army, the cooperation of two commanders, the cause of proclamation was being or not. That campaign may be the needed assembly. Cheon, Bong-jun maybe had the battle parade for the morale. Therefore He used the Baeksandaehoe. And He had the parade during some days. That had hold from 26, March to 29, March. He organized the headquarters and the ten thousand soldiers as official division. Finally, The Cause of proclamation in Baeksandaehoe had being or nothing. But that documentary was judged as it was. The Donghak peasant army had the strong commanding system as having Baeksan -daehoe in process. As Baeksandaehoe of the Donghak peasant army had leading role for the battle campaign. It is the important facts and studies in the revolution history.

한국어

동학혁명은 약 10개월에 걸쳐 전라도를 중심으로 거의 전국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혁명의 열기가 미친 파급과 역사적 영향력에 비해서 아직도 학계에는 연구되어야 할 과제들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사례 중 하나인 백산대회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최초로 형성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은 격문과 4대 명의 및 12조의 기율을 제정하고 전열을 정비해 혁명군으로서의 대오를 정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백산대회는 그 실체가 정확히 들어나지 않았다. 백산은 갑오년 1월의 고부기포 때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곳이었다. 그곳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충분한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고부기포에서 전봉준에 의해 지휘부가 설치될 정도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혁명이 본격적으로 불붙은 3월에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즉, 고부가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서의 상징성이 있다면 백산은 농민혁명군의 위상이 갖추어진 대회였기에 동학농민혁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일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료나 정황으로 보아 백산대회의 존재는 확실하다. 당시 백산에서는 전라도 각 지역에서 모인 1만여 명에 이르는 대부대가 집결했다. 이들은 모두 고부기포 당시에 전봉준이 돌린 기포의 당위를 알린 포고문이나 무장포고문 등에 동조하고 뜻을 함께 하기로 한 동학농민군이었다. 따라서 백산에서는 이들 대부대를 어떻게든 군사적 지휘체계로 바꾸고 대오를 정비해 본격적인 혁명의 전위에 나서게 할 필요가 있었다. 백산대회와 관련해 가장 큰 논쟁은 대회의 존재자체에 대한 유무였다. 그리고 백산대회의 정확한 일자에 대한 논란과 당시 동학농민군의 구성과 실체에 대한 논란 즉, 고부기포시의 지휘부와 무장기포시의 지휘부 그리고 백산대회의 지휘부의 연계성 논란과 마지막으로 백산대회 격문의 존재유무 등이 있어 왔다. 백산대회는 반드시 필요한 대회였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전국적인 동학농민혁명을 추진한 전봉준에게 그에 동조하고 집결하는 군사들에 대오를 편성할 대규모의 대회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 대회는 하루 만에 치루기보다는 몇 일간에 걸쳐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월 26일에서부터 3월 29일까지 열렸을 것이며 아울러 대회에서는 집행부를 구성하고 약 1만명 정도의 혁명군이 모였을 것이다. 끝으로 백산대회 격문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도 백산대회가 존재했다고 확신한다면 대회의 성격과 대의를 알리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대회취지를 밝히는 격문은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동학농민혁명군은 백산대회를 가짐으로서 본격적인 혁명군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대회를 통해 앞으로의 투쟁이 혁명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고 지휘체계를 갖추는 등 군율을 정비했다. 백산대회는 동학농민혁명이 조선의 전근대적 지배체제를 개혁하고 외세의 침탈을 물리치고 자주적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동학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단초적 역할을 한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제1차 백산 집결
 3. 제2차 백산대회
 4. 백산대회의 쟁점
  1) 백산대회의 존재 유무
  2) 백산대회의 정확한 일자
  3) 동학농민혁명군의 구성과 실체
  4) 백산대회 격문의 유무
 5. 결론 : 백산대회의 역사적 의의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임형진 HyungJin Rim. 경희대학교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함께 이용한 논문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 7,900원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