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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과 풍암리 전투

원문정보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eon, Gangwon-do and the battle of Pungam-ri

신영우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37호 2015.12 pp.7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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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Gangwon-do is the place where Donghak leader Choi Sihyung had made Donghak spread during sequestered period to avoid supression. In 1894,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eon, Gangwon-do prepare for uprising against the Japanese army by forcing riches in Gyeonggi-do to donate their wealth. The riches depence themselves by making Min-bo gun so that attack the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eon, Gangwon-do. They made sudden attack the Dong-hak peasant army and killed numerous ones. These stories was not known because of minimal recordings of Gojongsilrok(高宗實錄). The Gabogunjungsilgi(甲午軍政實記), however, has been used for studying recently shows more stories about the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eon, Gangwon-do. It is a new historical material of the Donghak peasant army. If the Donghak peasant army extended their power in Gyeonggi-do, Seoul might be threatened. The Dong-hak peasant army in Hong-chun, Gangwon-do was dispersed by the Minbogun(民堡軍) in Jipyeong, Gyenggi-do. Maeng Young-jae(孟英在), the leader of the Minbogun in Jipyeong, Gyeonggi-do was became the magistrate of Jipyeong(Hyengam, 縣監), Gyeonggi-do as a reward for the broken-up of the Donghak peasant army. He made arrested the several leaders of the Donghak peasant army in Gyeonggi-do and Chungcheong-do and stopped their spread. The battle between the Donghak peasant army in Pungam-ri of the Hongcheon, Gangwon-do and the Minbogun in Jipyeong, Gyeonggi-do provoked the weakness of the Joseon military power during the Joseons suffered form a foreign invasion.

한국어

강원도는 동학 교주 최시형이 은도기에 탄압을 피해서 교세를 보존하고 확대한 지역이었다. 1894년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무장봉기를 준비하면서 경기도까지 가서 부자들에게 돈과 곡식을 강제로 거둬들였다. 경기도 지평에서는 민보군을 결성해서 그런 활동을 적극 제지하였다. 그리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강원도 홍천까지 가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동학 근거지를 기습하고 많은 동학농민군을 죽였다. 이러한 내용은 『고종실록』에 간략하게 실려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최근에 연구에 활용하기 시작한 『갑오군정실기』는 더 많은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홍천에서 벌어진 사건은 이 자료에 의해 여러 가지를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홍천 서부의 동학 지도자 고석주 등은 팔봉과 필곡을 거점으로 홍천 경내는 물론 경기도 지평까지 활동무대를 넓혔다. 무장봉기를 위해 돈과 곡식을 모으면서 양반유생들과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 홍천의 동학농민군이 경기도에 세력을 확대했다면 서울도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지평의 민보군은 9월 12일 팔봉을 기습해서 그런 위협을 제거하였다. 그 공적으로 민보군 지도자 맹영재(孟英在)는 기전소모관 겸 지평현감이 되었다. 지평민보군은 경기도와 충청도 여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을 견제하면서 그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10월 22일 벌어진 풍암리전투는 ‘수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맹영재가 이끈 ‘홍천 여주 양근 지평 춘천 등의 포군 1,000여 명’이 공격한 전투였다.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이 전투는 강원도 일대의 상황을 결정지었다. 풍암리전투 이후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은 이전과 같은 기세를 보이지 못하였다. 풍암리의 동학농민군을 지휘한 대접주 차기석은 정성과 평창전투 이후 홍천민보군이 체포해서 처형하였다.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싸우지도 못하고 지평의 민보군에게 제압된 것은 비극이었다. 경복궁을 점거해서 국왕을 인질로 잡은 외적을 앞에 두고 서로 싸운 것이기 때문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지평민보군의 9월 12일 홍천 필봉 기습
 3. 기전소모관 맹영재의 경기도 일대 순회
 4. 홍천에 집결한 동학농민군과 풍암리전투(10월 22일)
 5. 맺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신영우 Young-ou Shin. 충북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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