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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감사와 갑오년의 충청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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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vernor of Chungcheong and the Critical Situation in 1894

신영우

동학학회 동학학보 제34호 2015.03 pp.18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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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is article is from the perspectives of the governor of Chungcheong to review the society of the province of Chungcheongdo. Until now, there was not seen that looked back as the high-ranking official compared to several case-studies which was seen by low-ranking executives. Chungcheongdo is the place where needs to study as the scale of the province because of the scale of the Donghak peasant army. The government saw Chungcheongdo as the center of the Donghak peasant army. The reason was that the Daedoso of Donghak was placed at Boeun, Chungcheongdo so that they gathered on a large scale. As the perspective of the superintendent of Chungcheong, we could understand the circumstance of 1894. In 1894, there was three, Cho Byeongho(趙秉鎬, 1847~1910) Lee Heonyoung(李金󰠕憲永, 1837~1908) Park Jaesoon(朴齊純, 1858~1916), all of them had brilliant career with good family, educational background. Even though the West cost of Chungcheongdo was the war zone of the Sino-Japanese war, the superintendent of Chungcheong could not interrupt. Instead of the restricttion the Donghak peasant army by government, the official had faced to defense its office. The battles of 1984 at Chucheongdo were known for intensity, but the as-built analysis was not released. The change of the Governor of Chungcheong was done during the battle. The main battle filed was about 12 areas. Twelve times was against to Japanese. Park Jaesoon was the only Governor of Chungcheong who had the merit of military service among them.

한국어

이 논문은 충청감사의 시각에서 갑오년을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작성한 글이다. 지금까지 군현이나 권역 단위의 사례연구는 나왔으나 도(道) 단위로 살펴본 적은 없지만 충청도는 동학농민군의 세력 규모와 봉기 상황을 볼 때 이러한 연구가 요구되는 곳이다. 충청도는 정부가 양호초토사와 양호도순무사와 같이 진압군 최고지휘관의 직함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동학농민군의 1차와 2차 봉기에서 중심 무대로 파악한 곳이다. 그 이유는 동학교단의 대도소가 충청도 보은에 설치되어 있었고, 동시에 동학농민군의 중심세력이 충처도에 위치해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청감사의 시각에서 보면 당시 일정하게 이해하게 된다. 충청감사는 경내 각 군현의 관아에서 올리는 보고를 받고 관내의 사태를 상세하게 파악하였다. 그리고 관속들을 지휘해서 효유, 진압, 선무, 안무, 기찰 등을 수행하거나 각 군현 관아에 명을 내렸다. 초토사나 순무영 선봉진, 그리고 소모사, 소모관, 별군관, 토포사과 일본군 후비보병제19대대도 감사와 협력해서 진압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1894년에 충청감사의 임무를 수행한 인물은 조병호(1847~1910) 이헌영(1837~1908) 박제순(1858~1916)이었다. 이들 3명은 개인 이력을 보면 상당한 역량을 갖고 있는 고위관리들이었다. 집안 배경이나 학식 그리고 관료로서의 경력은 화려하다고 평할 수 있다. 하지만 문관으로서 병란을 맞아 군사지휘나 봉기세력의 진압에는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감사로서 재임하는 시기에 각 군현의 관치질서 붕괴를 막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감영이나 병영 그리고 수영이 보유했던 무력이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충청도 내포 일대는 청일전쟁의 해전과 육전이 시작한 곳이었다. 관내에서 일어났지만 충청감사가 신식군대의 여단급 전투를 간여할 수 없었다.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도 감사가 통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전라도의 남접농민군과 영동과 옥천에서 온 북접농민군의 공주성 점거를 막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야 했다. 충청도에서 1894년에 벌어진 전투는 매우 치열하고 격렬하였지만 그 실상이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2차에 걸친 청주성전투를 비롯해 주요 전투만 들어도 다음과 같이 14회나 된다. 괴산전투, 안보전투, 문의전투, 증약전투, 승전곡전투, 홍주성전투, 세성산전투, 해미성전투, 우금치전투, 논산전투, 연산전투, 용산전투, 북실전투, 되자니전투. 이두황의 장위영 병대가 공격한 세성산전투와 해미성전투를 제외하면 모두 일본군과 싸운 전투였다. 승리한 전투로 평가할 수 있는 것도 괴산전투, 안보전투, 승전곡전투 3차례였다. 충청감사는 이러한 갑오년 상황 속에서도 교체가 이루어졌다. 조병호는 경상감사로 전임되었고, 이헌영은 신병으로 인해 짧은 기간만 재임하고 교체되었다. 박제순은 2차봉기를 맞아 충청감영을 지키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충청도의 동학농민군 주력은 일본군에게 제압당하고 그 기세가 수그러들게 된다. 그리고 민보군과 각 군현의 관아가 평정에 나선 후 해산하였다. 충청감사 박제순은 충청도에 밀려온 거대한 변란을 수습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3인의 감사 중 유일하게 군공이 인정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1894년에 재임한 충청감사 조병호 이헌영 박제순
 3.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와 충청감사 조병호
 4. 충청감사 이헌영과 청일전쟁·충청도의 동학농민군
  1) 충청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2) 일본군 제5사단의 충청도 행군
  3) 유생들의 반일 의병 추진과 금지
  4) 충청도의 동학도들과 충청감사 이헌영
 4. 충청감사 박제순과 공주 우금치전투
  1) 충청도의 동학농민군과 진압군 파견
  2) 공주 우금치 전투와 충청감사 박제순의 독전
 5. 맺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저자정보

  • 신영우 Shin, Young-ou. 충북대학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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