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영어
In 1894, North-West, South-West of Gyeongsangdo occupied by the Donghak Peasant Army who against Joseon Dynasty. The Donghak Peasant Army of Gyeongsangdo had a firm grip on the northwest area near Chungcheongdo and Jeonrado. At the end of October, the principal cities like Sangju(尙州) and Seonsan(善山 ) was occupied by Donghak Peasant Army. It was threatened the supply base of Japanese army at Nakdong(洛東) and hapyeong(海平). Japan began military intervention. Japanese army set up the quartermaster corps in 11 districts of Gyeongsangdo. Even though the Donghak Peasant Army awarded of the Japanese martial power, they targeted on the blocking Japanese military telegraph which was the only way to attack. The Japanese army counterattacked the Donghak Peasant Army. Minbogun(民堡軍) which organized by Joseon Dynasty organized and Namyoungbyeong(南營兵) which detached under Japanese coercion were also attacked the Donghak Peasant Army. The battle resulted in the defeat of the Donghak peasant army. On the other hand, Younghae(寧海) where is on the southeast area of Gyeongsangdo, faced a different situation by the peasants' uprising. It was not intervened by the Donghak. Since 1871 when Shin-Mi trouble occured, the Donghak couldn’t rebuild. The reason of the peasants’ uprising was same as the Donghak peasant army, misgovernment.
한국어
1894년 충청도와 전라도에 접경한 경상도 북서부와 남서부의 상주 선산 용궁 성주 하동 등에서는 읍내가 점거되었다. 10월 하순 동학농민군이 상주 선산을 점거하자 일본군이 즉각 개입하였다. 군사상의 필요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부산 삼랑진 물금 밀양 대구 청도 다부원 해평 낙동 태봉 문경의 11개 지역에 병참부를 설치하고 군용전선을 깔았다. 경상도의 동학농민군은 병참로를 따라 행군해간 일본군의 위력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대일전쟁을 준비하였다. 처음에는 전선을 단절하거나 전신주를 쓰러뜨려 전신망 차단이 목표였다. 일본군 후방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유일한 공격 방법이었다. 일본군은 이런 공세에 반응해서 동학 조직의 견제를 시작했는데 동학농민군의 무장봉기 이후에는 직접 반격을 가하거나, 조선정부에 강요해서 남영병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일본군 공격으로 동학농민군은 번번이 패배하고, 여러 군현에서 민보군을 결성하여 근거지를 수색하자 경상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곧 세력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군의 전신망과 병참망은 11월 초 이후에는 더 이상 위협을 받지 않았다. 경상도의 동남부 군현에서는 이와 달리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동학의 포접 조직과 인맥으로 구성된 동학농민군은 동학 세력이 미약하거나 존재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나타날 수 없었다. 영해를 비롯한 인근 군현은 1871년 신미년의 병란 이후 동학 조직이 재건되지 못했을 수 있다. 동학농민군의 봉기 원인인 폐정은 1894년에 여러 군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요인이었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지 않은 군현에서도 농민항쟁이 일어나 10월 초에 60여 군현이 소란했다고 한다. 1894년은 연이은 흉작으로 농민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경상도 71개 군현 중 37개 군현이 혹심한 흉년으로 고통을 받았다. 영해와 영천 등지의 농민항쟁은 경상도 북서부와 남서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를 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중하는 주도자는 원악도로 정배를 보낸 동시에 불법을 자행한 지방관과 향리도 엄벌을 내려 수습하였다. 농민항쟁은 부산의 일본영사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고 있었다. 농민항쟁은 관치질서 유지를 위해 수습되어야 했다. 일본군이 내정을 간섭하던 시기에도 정부로서는 동학농민군과 마찬가지로 지방관의 폐정에 항거하던 농민항쟁도 용납할 수 없었다. 동학농민군의 봉기나 농민항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책임은 감사에게 있었다. 경상감사는 지방관들의 착복과 공금 유용 사실을 조사해서 정부에 보고하였다. 민씨정권의 문란한 국정 운영이 지방 군현에서 나타난 사례가 지방관의 불법행위였고, 그것이 항쟁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목차
1. 머리말
2. 1894년 봄 경상도의 동학조직과 세력 확대
3. 일본군 5사단의 경상도 지역 군용전신·병참망 설치
4. 1894년 여름 이후 경상도의 동학농민군과 봉기상황
5. 1894년 경상도 동남부 일대의 농민항쟁과 수습책
6. 맺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